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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다리
페루(2) - 맞추피추 본문
16일차 (1/27.토) 맞추피추는 남미의 압권
새소리가 상쾌한 공기와 어우러지는 아침이다. 어제 저녁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 아침 5시까지 시체처럼 깊이 잠들었다가 깬 덕분에 심신이 개운하다. 모두들 부석한 얼굴들이지만 어제와는 달리 생기가 돈다.
아침에서야 비로소 호텔의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다. 끝이 둥글어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산봉우리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어제 저녁에는 저 산봉우리가 구름에 잔뜩 가려있었는데 오늘은 선명한 경계선을 보이며 활짝 드러나 보여 남미 여행의 절정을 장식할 맞추피추의 오늘 여정에 서광이 어린다.
페루에서는 제법 큰 마을에 해당될 우루밤바의 호텔앞 주변 동네는 농사짓는 소박한 분위기를 지닌 조용하고 깨끗한 마을로 일대를 천천히 둘러보고 싶은 매력을 풍긴다. 큰 도로 오른쪽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이고,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는 구멍 가게, 교회도 보인다. 길 앞에 있던 이곳 사람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뚫어져라 나를 관찰한다. 나도 그들을 바라보며 활짝 웃어 주었더니 시선을 돌리며 피해버린다. 순진할 정도로 부끄럼타는 그에게서 이곳 사람들의 착한 심성을 보는 것 같아 호감이 갔다. 마을은 궁색하지 않고 비교적 넉넉해 보였다.
호텔 정원도 깨끗하고 아담하게 가꾸어져 조경에 신경 쓴 흔적들이 보인다. 옥수수밭도 잔디밭 옆으로 뻗어 있고, 조형물을 배치한 사이사이에 울긋불긋 예쁜 꽃들이 피어나 퍽 조화롭다.
잉카천을 직접 짜 보이면서 가방, 목도리, 동전지갑 등을 파는 현지 여인이 호텔 잔디밭에 앉아 뜰을 거닐고 있는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수줍은 듯 곁눈질한다.
중정 앞에는 기념품 파는 장사꾼들의 난전도 허용하고 있었는데, 오카리나를 닮은, 진흙으로 구워 채색한 악기와 원색의 잉카 직물로 만든 주머니를 몇 개 샀다. 달러와 솔의 환전 계산과 물건값의 합계가 느린 아주머니를 대신해 계산해서 건넨 돈을 받아쥐고도 아주머니는 한참이나 계산이 안 되어 쩔쩔맨다. 혹시 잘못 계산되어 손해나 나지 않았을까 불안해 하는 표정이다.
우루밤바
우루밤바 (계산기)
우루밤바
우루밤바
우루밤바
7시 30분 숙소를 떠나 포장된 길을 달리다 비포장 도로에 접어 들어 1시간쯤 더 간 후 오얀따이 땀보에 도착했다. 오이얀따이는 아마존 부족 출신의 장군의 이름인데 그는 잉카 왕족이 아닌 관계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직을 얻지 못하던 중 왕족의 공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감옥 생활을 했는데 중간에 왕이 바뀌어서 감옥 생활을 청산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왕족의 일원으로 대우받게 되고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붕에 세운 부적의 의미를 지닌 황소 토우 장식이 이색적이고 전선 위에 올라 앉은 풀씨가 악착같이 붙어서 강한 생명력을 보이며 자라난 모습에서 험한 환경, 외세의 침입 앞에서도 살아남은 이 지역 잉카인의 자생력을 보는 것 같았다.
관광객을 위해 관람하도록 허용된 원주민 집에서는 살림 내부는 보지 못하고 그들의 생활의 특징을 한눈에 살펴보도록 꾸며놓은 공간을 볼 수 있었다. 식용으로 사육하는 꾸이(기니아 피그, 꼬리가 없고 2마리 이상의 새끼를 안 낳는 야생 동물로 단백질의 주요공급원으로 즐겨 먹는다고 함)떼와 벽감 위에 모셔 놓은 조상의 유골, 그 아래에 진설해 놓은 제물의 의미를 가진 돌, 나무로 깎은 각종 생활용품과 생활 모습을 담고 있는 조각들, 치차 만드는 검은 옥수수, 4500m 만년설 쌓인 고지대의 돌틈에서 자란다는 마까(영양제, 인삼같은 만병통치약), 정글에서 자라는 와이유로 열매(행운을 상징하는 검정과 빨강이 섞인 열매, 목걸이, 팔찌로 장식하여 액땜과 남녀간의 사랑 확인용으로 쓰인다고 함) 등이 그들 풍속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은 맞추피추 여행을 위해 오얀따이 땀보역으로 이동하는 관광객이나 트래킹을 하려는 사람들의 전진 기지 역할로 북적대지만 스페인군에 패해 이곳으로 도망쳤던 망꼬 잉카가 안띠족들을 모아 이곳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스페인군을 물리친 후 다시 그들을 피해 이곳을 버리고 정글 깊숙한 뷜까밤바로 도망친 이래,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최근까지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오얀따이 땀보
오얀따이 땀보역에서 9시 5분에 출발하는 맞추피추행 기차를 탔다. 1시간 30분 후면 맞추피추 입구역에 내린다고 한다. 기차는 정상 크기인데 선로는 협궤여서 좌우로 많이 흔들흔들 했으나 오랜만에 타는 기차라 재미있었다. 가끔씩 기적 소리를 울리는 건 선로 위에서 놀거나 일하거나 물건 파는 현지 사람들에게 경적을 울려 그들이 피하게 하려는 것이라는데 기찻길 옆에 피해 서서 쳐다보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눈빛, 얼굴 표정이 순박해 보이고 낯설지 않다. 그들에게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호감을 보였더니 반갑게 반응해 주며 웃는다.
이 열차는 1905년 설치를 시작하여 1925년 완공한 난공사였다. 영국의 기술과 자본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지분을 반반 나누어 가졌는데 그 절반의 지분도 슬프게도 작년에 임기가 끝난 후지모리 대통령 재임 시절, 부패한 정부에 의해 칠레에 넘어갔다고 한다. 맞추피추로 인해 얻는 관광 수입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처사이고 커다란 대통령의 실책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란 페루 항공도 철도처럼 민영화다, 뭐다 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이익에 눈멀어 국가적 손익은 생각하지 않고 네덜란드에 15년간의 사용권을 넘겼다니 역사에 죄를 지을 무책임한 위정자의 실책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나? 후지모리 대통령 통치의 공과를 논하기에 앞서 부패한 관리의 무책임한 실수와 어리석음은 이처럼 천파만파로 커져 국민들의 빚과 고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교훈과 더불어 이러한 부정부패는 하루빨리 과감하게 척결되어야 함을 먼저 생각해야겠다.
멀리 산중턱에 오얀따이 성이 바라보이는데 강 건너편에서 돌들을 날라 올렸다니 돌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직도 돌을 끌어올리는 용도로 만들었다는 비탈길이 남아있고, 그곳에는 채석장에서 끌고 오다가 그냥 놓아둔 직육면체 바위들이 길 옆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맞추피추 행 기차
맞추피추 행 기차
우루밤바 강을 따라 강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협궤 열차가 달린다. 우기로 불어난 강물은 흙탕물이 되어 포효하듯 소용돌이치며, 물거품과 물보라를 그리며 역동적으로 흐른다. 왼쪽 강안(江岸)엔 용설란이 빽빽이 자라고 여러 가지 잡풀들이 한가로이 기차길 옆을 장식한다.
역사도 없는 다리가 있는 지점에서 기차는 잠시 정차했다. 내린 손님들, 다리 위에 모여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커다란 배낭을 지고 있다. 이곳이 맞추피추로 오르기 위한 기본적인 3박4일의 트래킹코스의 시작점이란다. 옥수수밭이 길게 늘어서 있는 앞에서 그들은 짐을 점검하고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저 대열에 나도 끼고 싶다. 고소증과 더위와 무거운 짐에 도전해 보고 싶다. 잉카의 옛길을 걸어 오르며 잉카인의 숨결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러나, 그러나, 난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으로 맞추피추에 오르는 이 길을 선택했고, 달리는 열차 안에 앉아 있다.
잉카콜라 1병을 4솔 주고 사서 마셨다. 노란색의 톡 쏘는 그 맛이 상큼하고 시원하다. 또 엄지손톱 크기의 알갱이를 가진 잉카의 옥수수도 알갱이가 톡 터지며 입안 가득 수분이 고이는 것이 거칠거칠한 우리의 옥수수와는 약간 다른 맛이다. 밋밋한 옥수수에 짭짤한 치즈를 곁들여 먹는 것도 이곳만의 독특한 맛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다.
기차가 물흐름을 따라 함께 나아가는 걸 보니 지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나보다. 차창으로 점점 깊어지는 깎아지른 산봉우리, 안데스의 연봉을 보노라면 점점 올라가는 것 같은데 말이다.
계곡, 계곡, 그 다음 또 치솟는 산봉우리의 반복으로 울창한 산. 이러한 풍경은 정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늪지에 우거진 숲, 험한 풀들을 가르며 카누같이 생긴 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악어도 나타나고,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구렁이도 얽혀있고, ……. -을 깨게 한다. ‘구불구불한 실루엣이 환상적인 사구’로 연상되는 사막에 대한 고정관념이 그러하듯 아마존의 정글도 참으로 다양한 생태계의 모습을 가지고서 내게로 다가온다.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정글의 또 다른 모습들이 궁금하다.
잉카 트레킹 출발지
잉카 트레킹 코스
푸엔테 루이나스역에서 기차를 내려 토산품,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운집해 있는 사이길을 지났다. 다시 공용버스로 갈아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25분 정도 올라간다.
우루밤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 버스가 산자락을 감돌아 끝도 없을 것 같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간다. 밀림으로 무성한 아래에서는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접근하기조차 불가능했을 아득한 길이다. 나무들은 어제 내린 빗방울이 잎사귀에 남아있어 축축한 공기를 뿜으며 햇빛에 영롱하게 빛난다. 산은 활짝 개어 산봉우리가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온다.
어느덧 아래 계곡이 400m 정도 아득하게 보일 때쯤 자태도 도도하게 드러나는 앞쪽의 산봉우리에 잉카 깃발이 펄럭이는게 보인다. 그 뒤로 우뚝우뚝 연결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일 때쯤 왼쪽 방향으로 멀리 뒤로 돌아앉은 높다란 와이나피추 봉우리, 한 굽이 더 돌아가니 사진으로 많이 본 익숙한 모습의 맞추피추 마을이 드디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2,280m에 위치한 지점이다.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푸엔데 루이나스 역 앞
‘잃어버린 도시’, ‘공중도시’란 표현이 어울린다. 그 어디에도 마을은커녕 마을의 흔적같은 것도 있을 것 같지 않게 봉우리, 봉우리, 연봉들, 그 봉우리를 신비롭게 감싸는 안개, 구름뿐.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그때쯤 갑자기 부상하듯 우리의 눈앞에 맞추피추가 나타났으니 그런 기분이 왜 안 들었겠는가. 정글에 덮여 있었던 이 도시가 발견되고 발굴될 당시인 1911년에는 충분히 그런 표현이 나옴직하다. 이곳은 서양학자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는 산과 절벽, 우루밤바 강 유역에 우거진 밀림에 가려 밑에선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공중도시’이고,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잃어버린 도시’라고 불렸다고 한다.
남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 볼리바르에 관해 미국 예일대에서 공부하던 역사학 교수인 와이럼 빙험이 1909년 볼리바르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처음 페루 땅을 밟았다. 그때 우연히 쵸케끼라우 유적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지 2년 후인 1911년, 잉카의 마지막 왕 뚜빡 아마루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잃어버린 도시’ 뷜까밤바를 찾기 위해 다시 페루로 돌아왔다.
그해 7월 그는 몇몇 기록들을 토대로 우루밤바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뷜까밤바를 찾기 시작했고, 어느 날 이 지역의 한 원주민이 한 말, ‘대단히 높은 산자락에 유적지 같은 것이 있다.’라는 말에 유일한 희망을 두고 험한 산길을 헤치고 올라간다. 밀림에 덮이고 흙에 파묻힌 옛 잉카길을 더듬어 간신히 올라간 끝에 그들은 이곳을 발견했다.
이곳을 발견하는 순간의 그들의 모습과 심정을 헤아려 본다. 그 시간이 1911년 7월 24일 아침 10시경. 놀라움과 환희에 눈물, 콧물 흘리며 좋아하는…….
그때에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2가구의 농부가 맞추피추 남쪽 산비탈의 계단식 밭을 일궈 화전식 농사를 지으며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의 존재 가치는 전혀 모른 채, 유적지 돌덩이를 주워다 자기네 집을 짓고, 그렇게 익숙한, 낯설지 않은 환경 속에서 삶의 터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다니, 누군 인류 문화유산으로 길이 남을 유적지의 기적같은 발견을 했고, 누군 늘 살던 익숙한 삶의 터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같은 곳을 두고도 앎과 무지의 차이가 이처럼 크다는 생각에 진정 삶에 참된 가치와 무게를 주는 건,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란 앎을 통한 발견의 기쁨인지, 무지하지만 순박하게 살면서 누리게 되는 평온함, 평화로움인지 얼른 가늠이 안 된다.
잠시 이곳의 발견 사실은 비밀로 덮어 놓았다가 1912년부터 유물, 건축, 고고학 분야 발굴팀이 결성되어 발굴, 복원되었다는데 빙엄은 이곳이 잉카의 마지막 수도 뷜까밤바라고 믿고 있었고, 여러 의심나는 점까지도 ‘뷜까밤바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모든 추리를 해나갔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그의 결론(이곳은 뷜까밤바)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와이럼 빙험은 이곳 발견의 업적으로 미국 상원의원까지 지냈고, 조언을 준 뷜까밤바의 농부에게는 각 1달러씩 후사를 했다는 후일담도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미국인의 이기심에 돌을 던진 누군가의 말이겠지.
스페인문화의 흔적이 이곳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 적들에게 쫓겨 도망간 망꼬 잉카 왕이 짧은 시간에 지은 도시로 보기에는 건축 솜씨가 너무 뛰어나고 너무 안정되어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이곳이 뷜까밤바일 수 없는 충분한 이유는 되지만 맞추피추는 어떠한 곳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 이 도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으며, 왜 스페인인들은 이 도시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가, 스페인인들이 이 도시의 존재를 몰랐다면 그건 잉카 사람들이 숨겼기 때문인가, 아니면 잉카 사람들도 몰랐기 때문인가 하는 문제들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면서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총면적 5평방 킬로미터이며 도시의 절반 가량이 경사면을 이루고 주위는 높이 5m, 두께 1.8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견고한 요새 모양을 갖춘 맞추피추의 도시 기능에 대해서는 여러 가정들이 있다. 신성한 종교적 도시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곳, 파차쿠텍의 잉카가 들어오면서 건설한 아마존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진기지, 아마존과 쿠스코를 이어주는 교역․상업 도시로서의 기능이 그것이다. 2000년 전에 이미 세워진 도시 터전 위에 잉카가 그 위에 더 추가하였을 거라는 것은 주요 장소에서 출토된 900여점의 도자기 생활용품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잉카의 유물로는 여자용품인 빗, 거울 등이 발견되고 발굴된 165점의 유골들 대부분이 여자이고 종교적인 건물이 많다는 점에서 선택된 태양의 여자들이 수용되어 의식을 집행하던 종교적 장소로 추측하기도 하며, 지나치게 넓은 계단식 밭을 이용하여 쿠스코 귀족들에게 특별한 농산물인 코카를 제공하기 위한 농업도시였을 거라고 말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도시의 신비와 매력을 더하게 한다.
현재 맞추피추 주변에서 계속 발굴되는 유적지를 보면 공중 도시가 아니라 산 아래쪽에서 다른 지역까지 삶의 흔적들이 이어지고 있고, 서로 연결되는 길은 소나타 승용차가 지나갈 정도로 넓게 쿠스코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존의 물품이 이곳에 대량 유입되어 교역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따라서 교역과 상업의 도시이자 아마존으로의 전진이 가능한 특수목적도시로 볼 수 있겠다는 이론에 공감이 갔다.
약 1만 명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맞추피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남쪽 봉우리인데,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는 산, 꿈의 장소라는 꾸뚜꾸시, 서쪽은 미카엘 천사를 지칭하는 스페인식 이름인 산미겔, 북쪽으로는 ‘젊은 봉우리’라는 뜻의 와이나피추 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한 가운데 산비탈에 형성되어 있다. 맞추피추 봉우리 정상에는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봉우리 아래쪽으로 길이 나 있어 맞추피추 정문에 해당하는 태양의 문을 통해 들고 나는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해 산을 넘어 잉카 로드를 따라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동,서,남,북의 방향의 지표인 산봉우리 말고도 도시 유적지 가운데에는 방향을 나타내는 돌이 나침반의 바늘 모양으로 깎여서 세워져 있는데 뾰족한 끝이 남십자성을 가리키고 깎인 모양에 따라 그림자의 모양이 매일 매시간 바뀌는데 12월 21일은 그림자 모양이 야마 얼굴 형태를 그린다고 한다.
또한 일명 ‘태양을 묶는 기둥’이라 불리는 인티와따나도 태양신에 대한 제의적인 의미 말고도 태양을 묶는 기능을 한다는 돌기둥의 그림자가 해시계의 역할을 하여 매일의 시간은 물론 절기를 알아내는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12월 21일에는 돌기둥의 그림자가 정확히 퓨마의 눈에 드리워져 춘․추분의 절기도 알아냄)
이는 지형지물의 이용은 물론 천체 관측의 뛰어난 기술을 활용하여 농경에 필요한 파종, 수확 시기를 결정했음을 알 수 있어, 돌을 정교하게 다루는 기술에 더하여 천문학적으로도 수준 높은 그들의 문명을 짐작하게 해 준다.
맞추피추 건축물들은 중앙에 중정(파티오)을 가지고 있고, 모든 건물들의 벽의 중앙에 사다리꼴 형태의 벽감이 있으며, 3개의 벽면만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1면은 바람이 잘 통하도록 와이로나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 신전이나 궁전은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모르타르 없이 바른쌓기로 축조했다.
이제 과학적이면서도 예술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이 신비로운 세계로 조심스럽게 가슴 두근거리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꿈에서나 그려볼 그 땅을 실제로 밟았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건 현실이다. 실제 상황이다.
맞추피추 행 버스
맞추피추 기념 스탬프
세계의 유적지답게 입장하려는 사람이 출입구에 길게 줄 서 있다. 입장권 1장으로 3일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니 유적지 관람의 편의를 최대한 고려한 탄력있는 방침인 것 같다.
입구에는 맞추피추 전경을 찍은 대형 사진이 걸려 있는데 2006년 사진 촬영 1위 작품이란다. 렌즈에 딱 맞게 사진 찍으니 마치 내가 찍은 사진처럼 잘 나왔다. 이것도 저작권 문제에 저촉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 놓은 남쪽 전망대를 향한 가파른 계단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전체 조망, 사진 찍기, 이미 공부한 구역이 어디쯤인가 살피며 도시 전체의 조망이 가장 좋다는 맨 꼭대기에 올랐다. 잉카 농가의 전형적인 오두막 초가집 전망대에 앉았다.
푸른 하늘 아래 계획적으로 구획지어진 돌담, 돌벽들이 오밀조밀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다. 과거의 영화로웠던 삶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무심하게 그렇게 있을 뿐이다. 태양은 자신을 온몸으로 섬겼던 사랑스러운 자녀들의 땅을 아낌없이 비춰주고 있다. 산비탈 마을은 삶의 터전으로 활기에 넘쳤던 그때를 꿈꾸듯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여기저기 잔디밭에 자유롭게 앉아 무심히 앞 봉우리 와이나피추를 바라보는 사람들, 아래로 이어진 계단식 밭을 배경으로 사진찍는 사람들, 이리저리 방목된 채로 풀을 뜯고 있는 순한 표정의 야마, 그들을 신기해 하며 바라보는 여행객들, 그리고 나무밑 그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료수와 음식을 먹고 있는 배낭 여행객, 간간이 풀밭에 누워 잉카의 꿈속에 젖어있는 사람들까지 모두들 맞추피추 풍경화의 소품들처럼 거기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과거 속으로 날아간다.
맞추피추는 동측에서 서측으로 이어지는 대계단과 높은 방호 벽, 그리고 수로에 의하여 북부와 남부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남측으로는 고지대 농업지구와 저지대 농업지구가 있고, 북측은 도시구역이다. 도시구역은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서부 도시구역인 하난과 동부 도시구역인 후린으로 나뉜다. 서부지역은 왕궁, 탑, 신전 등 권위적이고 종교적인 건축물로 그 조형성이 뛰어나고, 동부지역은 주로 대중집단을 위한 주거와 작업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로는 도시를 농업지역과 도시지역으로 양분하며 대단위 테라스로 이루어진 계단들과 나란히 종축으로 만들어졌다. 우기 때 빗물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작은 저수조를 단에 따라 많이 만들었다. 수로의 바닥은 비교적 매끈한 판석으로 다졌고, 측벽은 거친 돌이나 다듬돌로 되어 있다. 대수로의 너비는 약 3m, 깊이는 약 1m이다.
수로와 함께 도시구역을 경계하는 것은 단형의 길고 높은 계단이다. 이 계단은 최대의 경작지 확보를 위해 건설된 대부분의 잉카 도시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으로 도시의 방어에 유리하도록 은폐되어 있다. 계단은 저지대 농업지구에서 고지대 농업지구인 망루까지 거의 직선으로 길고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뚜렷하게 도시구역과 구별된다.
맞추피추
망루에서 태양의 문을 향해 비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테라스. 산비탈뿐만 아니라 주변의 깎아지른 벼랑까지도 테라스로 이루어져 도시 전체가 테라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테라스의 길이, 형태는 지형에 따라 다양하지만, 산비탈의 계단식 테라스는 잉카인의 훌륭한 농업 생산 구역으로 길이가 약 90m,너비가 4m, 1.5m 높이의 단을 쌓아 만들었는데 맞추피추 어느 곳에서 보아도 경이롭게 보인다. 이 테라스들은 대수로를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게 하여 배수와 물의 침수를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테라스 사이의 수로, 계단은 내려다 보기에도 아찔한데 많은 사람들이 그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필리핀의 산간지대, 중국 윈난성 나평 지역의 다락논은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더불어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으로서의 인간 의지의 최고 결정판으로 평가받는 곳이지만 이곳의 계단식 테라스는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설계되고 건설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면이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비탈을 처리하여 농지를 확보하면서도 절벽의 가장자리에 놓여진 테라스는 건축물을 지탱시켜 주고, 침식을 방지하도록 산의 지형을 조정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테라스는 잉카시대 이전부터 안데스 문명을 꽃피우는 바탕이 되었고 농업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경제 기반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 영농이 사용될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3m정도 폭의 넓은 도로를 따라 내려와 태양의 문 앞에 섰다. 우루밤바 강과 연결된 수직계단이나 잉카로드를 따라 맞추피추에 도착한 챠스끼나 방문객은 도시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지대 농업지역을 지나 잉카로드의 마지막 관문에 위치한 이곳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훈련된 경비병이 지키는 문 앞에서 느꼈을 설레임은 잘 다듬어진 커다란 돌기둥과 거대한 크기의 돌상인방이 얹혀진 문이 주는 엄숙하고도 압도적인 분위기에 눌려 두려움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출입 허가가 떨어지고 안으로 들어가서 안도의 심호흡 한 번, 그리고 뒤돌아 서서 무사히 통과해 온 문을 바라보았으리라. 거대한 크기의 나무문이 문설주 한쪽 벽에 돌로 고정되어 있다. 상인방 바로 아래 가운데에 돌로 된 고리가 돌출되어 있는 것에 시선이 머문다. 어두워져 저 문을 닫은 후에는 저 고리에 문틀 고리를 끼우나 보군. 철저한 방어 장치를 한 태양의 문에 경외의 시선을 던진다. 챠스끼의 영상을 지운 자리에 나무문은 사라지고 그러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석제 박았던 흔적이 양쪽 기둥에 남아 있다.
맞추피추
서부 도시구역에 접어들었다. 왼쪽 절벽쪽의 급경사를 따라 석축을 쌓은 테라스에는 여러 개의 창이 나 있다. 물빠짐을 위한 구멍인가 싶었는데 외부 전망과 감시를 겸하던 마을을 지키는 경비 초소였을 가능성이 크단다. 오른쪽 건물군의 외곽은 높은 돌담과 건물벽으로 맞추피추를 차폐해 주고 있고 집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지위를 누렸던 귀족들의 거주공간이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벽 위쪽의 바깥을 향한 돌출 막대는 지붕을 설치할 때 묶어주는 구실을 한 것 같다.
언덕 아래쪽으로 채석장이었던 듯한 장소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돌다루는 도구, 연장들이 많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나무를 박은 후 물을 부어 바위를 쪼개고, 모래를 채워 돌표면을 다듬고, ……. 앞쪽에 있는 돌 하나에는 돌을 쪼개는 작업을 해 놓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실은 20세기의 어느 학자의 솜씨라고 한다. 거칠고 크고 작은 바위, 지금도 많은 돌들이 산더미를 이룬다.
멀리 바라보이는 도시의 가운데 광장은 초록의 잔디 구장처럼 넓고 깨끗하다. 정가운데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만 홈으로 남아 있다. 그 오벨리스크는 예일대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발견자, 복원자의 특권으로 문화 유산들을 자국으로 옮겨간 문명국들은 결국 유물 도둑들인 셈이다.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유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유물 주인격인 원주민들에게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우거나 돈에 눈이 먼 원주민이나 부패한 관리들에게 싸구려 대가를 지불하고 빼돌린 것들이니 결국 문명의 역사는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음을 또 한 번 확인했다.
맞추피추 : 서부 도시구역
사원그룹에 들어섰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고 있는 3개의 거대한 사다리꼴 창을 갖고 있다고 하여 창이 세 개 달린 사원으로 불리는 사원을 마주했다. 대광장과 서부 도시구역을 면하고 있으며 멀리 동쪽의 산들을 향하고 있다. 양쪽 모서리는 큰 석재로 만들었고 안쪽의 오목한 모서리는 톱니모양 또는 T자형의 석재로 되어 있다. 창문을 낸 상인방과 그것을 받치고 있는 돌들은 요철로 다듬어 잘 맞물려 놓았다. 크고 불규칙한 흰색 화강암의 돌들을 정교하게 깎아서 정확히 들어 맞도록 하여 지진의 경우 돌들이 갈라지거나 미끄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퍽 아름다운 설치미술 작품같다. 그런데 출입문만큼이나 큰 창의 용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맞추피추 : 중심사원
신전의 부속 건물로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제관들이 대기하기에 적당하다고 해서 제관들의 방이라고 불리는 건물을 지났다. 이 건물 입구의 왼쪽에 있는 돌 하나는 32면을 주위의 돌들과 맞대고 있어 쿠스코의 로레토 거리에 있는 32각의 돌을 떠올려 주었다.
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정체를 이루는 경사길을 천천히 올라가 태양을 잡아매는 기둥이 있는 바위 앞에 섰다. 페루에서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인띠와따나라고 한다. 다른 잉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태양의 신전은 스페인 정복시대 우상 파괴론자들의 광적인 파괴로 그 원형을 찾아보기가 힘든데 비해 잃어버린 도시 맞추피추의 인띠와따나는 잘 보존이 되어 있는데 기둥 주변은 장대석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대한 퓨마 모양의 돌 위에 수직으로 솟은 기둥의 네 모서리 꼭지점이 기본 4방위와 일치하고, 남북의 긴 가상적인 선은 지리적으로 북쪽을 가리킨다. ‘수직 기둥에 고정된 어떤 사슬이나 고리 혹은 푼차오 신상은 동짓날 태양이 떠나가는 것을 막고 그것의 빛과 열, 생명을 이 세상에 전해주러 되돌아올 것을 간청한다는 상징적인 태양 고정작업과 관련되었을 것이다.’라는 이론과 연대기 학자들의 천문관측과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인띠와따나가 무엇이었을까를 유추할 수 있다.
맞추피추 : 인띠와따나
동부 도시구역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일반 대중들을 위한 주거와 작업장 그리고 거주민의 통제를 위한 건물군으로 계획된 지역이어서 2개의 절구 집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어도우비 모르타르를 사용하여 막돌로 지어졌다. 동부 도시구역의 외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의 절벽으로서 돌을 깎아서 만든 동굴 속에 일반 서민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한 독수리 건물군은 일반 대중들의 신앙, 자유와 관계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독수리 부리 모양의 신전그룹과 도시민의 질서 유지를 위한 감옥그룹이 있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위 뒤로 돌아가 보았다. 와이나피추로 향하는 길목이 보이고 도도한 모습의 와이나피추 봉우리가 정면에 버티고 있다. 길이 보이면 길의 끝까지 따라 걷고 싶고, 산이 보이면 정상까지 올라야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왕복 3시간 이상이 소요된다는 와이나피추를 못 간다는 사실이 이처럼 아쉬울 수가 없다. 점심 식사를 반납하고서라도 저 길을 따라 달의 신전이 있다는 북쪽 봉우리를 오르고 싶다. 젊은 봉우리에 올라 내려다보는 이곳의 전망, 우루밤바 계곡의 느낌이 어떠할지 몹시 궁금하다.
오른쪽 끝자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의 90도 이상의 단애이다. 서 있는 둑의 밑받침도 없이 허공에 들려있는 것 같아 두 다리에 힘이 빠진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도시의 동쪽 밖으로 접하고 있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복잡한 통로와 거칠게 쌓아 올린 벽돌로 밀집된 주거군을 지나 두 개의 절구 집회장으로 갔다. 다른 건축물들과의 분리를 위한 듯한, 문이 전혀 없는 거대한 벽을 지나 모르타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깎은 돌만 가지고 훌륭하게 마무리한 동부 도시구역의 유일한 건물이다. 세 개의 문이 달린 방 한 가운데 오목한 원형으로 새겨진 절구 모양의 바위가 있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불그스레하게 채색된 벽과 아름다운 옷감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직물과 도자기를 다루는 큰 작업장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한다.
맞추피추 : 동부 도시구역
도시 동쪽의 약간 비탈진 곳에 미끄러져 내릴 듯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약 45도 기울어진 바위 위쪽 모퉁이를 깎아서 만들어진 계단과 계단참은 동쪽 산의 신령들에게 받쳐진 봉헌물의 제단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바위 위 앞쪽으로 지표면 가까이 양각된 독수리 머리 형태가 분수의 물을 마시다 굳어버린 부리처럼 보인다. 이곳이 콘도르 신전이다. 독수리 머리는 정확히 동쪽을 가리키고 있고 상부의 떠받친 매끈한 삼각형 모양의 바위는 독수리가 두 날개를 활짝 편 상태를 연상시켜 준다. 아마 하늘을 자유롭게, 거칠 것 없이 용맹한 모습으로 나는 하늘의 제왕에게 제를 올리면서 잉카인의 자유, 기개, 권위를 대신하는 상징물로 여겼으리라. 목에 하얀 띠를 두르고 물을 마시는 형상의 주변 조형물은 물길을 내고 거기에 부운 술이 홈을 타고 땅에 스며들게 만들어 결국 대지의 신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던 장소임을 보여준다.
콘도르의 날개가 되는 부분의 바위 아래와 그 주변의 건물들은 마치 지하 감방처럼 만들어져 있다고 해서 감옥으로 부르기도 한다. 구멍이 있는 벽감은 죄수를 매어놓고 고문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감옥이 아닌 장례 장소로 보고 벽감 위에는 제물, 미이라를 놓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맞추피추 : 콘도르 신전
맞추피추 : 콘도르 신전
도시의 배후에 위치한 늙은 산 피추(산)로부터 내려온 작은 물줄기는 아래쪽(남쪽) 샘으로 모아진다. 모아진 물은 맑고 깨끗한 상태로 수로를 따라 흘러가면서 무려 열여섯 개나 되는 정밀하게 조각된 분수로 힘차게 뿜어져 나온다. 각각의 분수는 보다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전 분수로부터 물을 끌어와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육면체의 저수통에 쏟아 붓는다. 석조 저수통에 일정량의 물을 채워 넘친 물은 또다른 수로를 통하여 다음 분수로 보내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분수 기술의 걸작으로 ‘마법의 분수’라고 불릴 만하다.
맞추피추 : 중심분수
중심분수는 투카의 욕조라고도 불릴 만큼 조각된 벽돌과 수조 그리고 네 개의 벽감들이 정교하게 어우러져 단아한 자연의 욕조를 연상시킨다. 다른 분수들과 달리 실용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제식적인 성격을 다분히 가지고 있어 침례, 신들에 대한 숭배로서의 사제의 물뿌리기, 세정식 등을 위하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심분수 위에 있는 맞추피추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라고 하는 와이로나 앞에 섰다. 세 개의 벽으로 둘러쳐진 내부 벽 안으로 여섯 개의 벽감과 세 개의 기둥 그리고 휴식을 위한 커다란 등받이를 갖추고 있다. 이곳은 작은 집회와 환담을 나누는 휴식처로 사용되었을 거란다.
중앙분수에서 올려다보아야만 볼 수 있는 위치에 북측으로 트인 거대한 사다리꼴의 수수께끼 창이 있는 탑이 있는데 이 창 아래의 거대한 바위를 토대로 올려져 있다. 그 거대한 바위에는 잉카건축의 특이한 양식의 하나로 자연적인 동굴에 인위적인 공간을 예술적으로 만든 공간이 있는데 미이라들이 발견되어 잉카왕의 무덤
맞추피추 : 태양의 신전과 수수께끼의 창
왕궁은 분수로 이어지는 계단에 의해 와이로나와 분리된다. 왕궁은 주위의 그룹 건물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마무리가 잘 되어 있어 주거지로서 가장 뛰어나다. 왕궁의 문과 벽은 위엄이 강조된 권위적 분위기를 풍겨 부족장, 잉카 귀족 중 한 사람 혹은 지배 계급에 속하는 몇몇 사람들의 거주지였음을 알려준다.
한 덩어리 상태의 원석을 깎아서 만들어진 일곱단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탑 앞으로 2개 층 사이에 내부 통로가 없는 2층 건물이 있다. 돌계단이 높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다듬돌 그리고 도시에서는 유일하게 2층 주택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잉카의 왕녀나 혹은 여사제 등 고귀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용하던 곳으로 추측된다. 잉카의 왕녀는 주택 옆에 위치한 투카의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돌계단을 올라 2층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맞추피추 : 태양의 신전
맞추피추 : 왕궁
맞추피추 : 태양의 신전
도시구역을 한 바퀴 돌아 남측지역 산비탈이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공간을 마주하고 섰다. 아름다운 테라스가 아득히 펼쳐져 도시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저지대 농업구역이다. 올려다보는 테라스가 하늘을 오르는 잿빛의 사닥다리라면 내려다보는 테라스는 구름 위에 두둥실 피어나는 초록의 물결이다.
농민들의 거주지와 곡식의 보호 및 창고 역할도 했다는 초가 건물들이 운치있게 늘어서 있는 교외거주지를 지난다. 동서의 가파른 단 높이에 따라 튼튼하게 석축을 쌓고 그 위로 도시를 막아서듯 일렬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주택 상부는 박공으로 처리된 맞배건물 형태로 경사각이 크다.
어느덧 시간은 2시 30분. 마지막 순간까지 눈에, 마음에 맞추피추를 영원히 담아두고 싶은 마음에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맞추피추 : 계단식 영농지
맞추피추
교외거주지를 마지막으로 맞추피추 입구에 다시 섰다. 출입구 사무실에서 여권에 방문 기념스탬프를 찍어 주었다. 뛰다시피 숨차게, 바삐 움직이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햄버거 하나 들고 테라스 어디쯤에 걸터 앉아 돌벽, 돌층계로 남아있는 잉카, 그 이전의 사람들을 상상해보는 한가로움을 누려보고 싶다.
잉카 로드를 따라 트래킹도 하고, 와이나피추 정상까지도 오르면서 이 도시가 지닌 매력에 푹 빠져보고 싶다. 역시 맞추피추는 나와 우리를 배반하지 않고 중남미 여행의 절정을 선물해 주었다. 맞추피추는 단연코 중남미의 압권이다.
4시 20분 기차를 타기 위해 올라올 때 탔던 버스에 다시 올랐다. 지그재그 나선형 산굽이를 돌 때 붉은 색의 인디오 옷을 입은 소년이 모퉁이에 서서 ‘굿바이’를 외치며 손을 흔든다. 일명 '굿바이 소년‘이다. 또 다시 모퉁이를 돌고 나면 아까 그 소년이 직선 계단길을 버스보다 먼저 달려 내려와 다시 ’굿바이‘를 외치며 손을 흔든다. 사전 지식이 없이 그 소년을 만났으면 맞추피추와의 아쉬운 이별을 더욱 정겹게 하는 이색적인 풍경이어서 신기하면서도 아쉬움이 배가되었겠지만, 이미 관광 유명품으로 알려져 있는 굿바이 보이는 악 쓰며 외치는 굿바이 소리로 인해 억지스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버스 위에 올라서서도 감정없는 기계적인 어조로 발악하듯 ’굿 바이, 사요나라, 안녕히 가세요.‘ 라는 3~4개국 정도의 말로 외치는데 그 소리는 상흔에 아파하는 소년의 발악, 아니 페루의 가난한 현실에 통곡하는 대다수 페루인의 울부짖음으로 들려 가슴이 아팠다.
한때는 저 아이들의 수입을 버스 기사가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인지 유언비어인지 모를 얘기도 나돌았지만 요즘은 학교도 못 다닐 정도의 가난한 아이들의 아르바이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역 앞 다리까지 뛰어 내려오면 버스에 오르도록 기사가 배려해 주고, 맨발(지금은 신발을 신었음)로 뛰어내려온 땀범벅의 아이를 격려하는 의미로 관광객들이 건네는 학용품이나 먹을 것, 1,2달러 정도의 돈이 그들의 하루 수입이란다. 역에서 맞추피추까지 운행하는 현지인 운전 기사들 대부분이 굿바이 보이 출신들이어서 그 소년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도와주고 있다고.
맞추피추를 이끄는 마을이라는 아구아스 깔리 마을을 차창으로 내다보면서 달리는 기차, 그 기차를 타고 있는 2시간 남짓 동안 대구에서 온 안젤라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신앙, 가족, 사는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산자락이 하얗게 빛나는 살리나스 소금광산도 보고, 강 왼쪽 만년설 쌓인 산도 바라보며 석양 후 차차 색깔이 바뀌면서 어둠이 짙어지는 길을 버스는 달린다, 쿠스코를 향해.
하나 둘 떠오른 별들과 상현을 지나 배가 조금 더 부른 달도 우리를 따라왔고, 조용한 음악이 마음을 묘하게 흔들어 놓는 시간이다. 귀가길같은 기분을 자아내는, 귀가가 아닌 나그네의 길을 차는 하염없이 달린다. 삶의 문제,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차분히 점검해 보게 된다. 결론은 ‘감사함’이다., ‘길’ 위에 있을 수 있는 ‘현재’에 대한 감사.
쿠스코에서 중앙 광장 앞 성당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로레토 거리의 석벽을 둘러보았다. 잉카시대에 쌓은 칼로 잰 듯이 반듯한 벽돌담이 골목 양쪽으로 이어져 있다. 오른쪽은 카파크 왕의 궁정이었고 왼쪽은 선택받은 여자들이 살던 곳이다. 다른 지역에서 가져왔다는 섬록암의 12각의 돌은 어둑어둑한 시간이어서 더욱 신비스럽게 빛났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돌을 다루고 잘라서 암수를 맞춰 쌓은 12각의 돌. 몬드리안의 작품이 입체화하여 튀어나온 듯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쿠스코 : 12각 돌벽
쿠스코 : 아르마스 광장
쿠스코 : 아르마스 광장
쿠스코 : 콤파니아 성당
페루 음악, 잉카인의 전통 노래와 연주를 들으며 뷔페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꾸이로 만든 요리도 있었으나 낮에 본 꾸이가 생각나 손을 못 대겠다. 고산증이 염려되어 입에 맞는 몇 가지로 간단히 먹으며 음악을 들었다.
울림이 멀리 퍼지며 애절한 소리를 내는 께냐(우리의 대금같은 것), 대여섯 개의 길이가 다른 갈대, 혹은 대나무를 가로로 나열하여 묶은 샤포냐, 이 샤포냐는 탄식하듯, 한숨쉬듯 비음 섞인 흐느낌 소리인데 안데스 산자락의 바람 소리가 저 대나무 관속에 저장되었다가 다시 슬픈 신화로 재생되어 나오는 것 같은 은근한 매력이 풍겼다. 그리고 챠랑고(만들린 같은 것)와 북, 기타가 어우러지는 연주와 노래는 그 독특한 음색과 리듬으로 인해 식당 안의 손님들을 안데스 산록으로 데려가 준다.
쿠스코의 밤의 낭만을 즐기기 위해 저녁 식사 후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왔다. 드레스 입은 신부, 신랑을 만나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며 기념 사진도 찍고, 광장을 중심으로 상점 앞으로 연결된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걷는데 비가 쏟아졌다. 중앙 광장의 까페에 앉아 광장의 야경을 감상하며 쿠스코의 유명 맥주 ‘쿠스케냐’를 한 잔 들이키고 싶었는데 우산이 없어 비를 피해 우왕좌왕 하다가 회랑 바닥에 난전을 펼치기 시작하는 악세사리 상인들, 까페 입구에 진을 치고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호객하며 귀찮게 따라붙는 종업원들, 무작정 어정거리는 경박하게 시끄러운 젊은이들로 어수선하고 축축한 분위기가 싫어 티코가 아닌 다른 차종인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쿠스코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말았다.
오늘의 일정 : - 7시 30분 호텔 출발, 오얀따이 땀보 마을과 원주민 집 견학
- 오얀타이 땀보 역에서 맞추피추행 기차 탑승
- 푸엔테 루이나스 역에서 기차 내린 후 바로 버스 탑승
- 맞추피추 도착 후 잃어버린 잉카 도시 답사
- SANCTUARY LODGE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
- 버스로 쿠스코로 이동, 도착 후 로레토 거리 답사
- Don Antonio에서 저녁 식사
- 식사 후 자유시간
- Jose Antonio Hotel 603호실 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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