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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다리
페루(1) - 쿠스코 본문
15일차 (1/26.금) 쿠스코 돌 성벽에서 느낀 잉카의 숨결
페루는 남미 대륙 서해안 중앙에 위치하고 적도 바로 밑에서부터 남위 18도에 걸쳐있으며, 면적이 128만 5천 평방킬로미터인 나라로 남한의 약 13배 정도다. 인구는 2,566만 명(2000년) 정도로 공용어로 스페인어와 인디오의 케추아어를 사용한다. 에콰도르, 콜롬비아, 브라질, 볼리비아,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한국보다 시차가 14시간 정도 늦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안데스 산맥이 길게 볼리비아와 칠레를 향해 남쪽으로 향하며 해발 4,000m에서 6,000m에 이르는 고지대를 형성하고 있고, 태평양 아따까마 사막으로 내려가며 황색과 푸른 바다가 경계선을 펼친다. 동부 몬타나 지대는 연 강수량이 2,000mm 이상이지만 해안 사막 지대는 일년 내내 비를 보기 힘들다. 그리고 안데스 동편으로는 브라질로 이어지는 거대 아마존이 숨을 쉰다. 사막, 고산, 밀림…… 이렇게 3대 거대 자연이 한 곳에 모인 나라여서 여러 기후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남태평양에 면한 사막에는 한류와 난류가 겹치며 형성된 천혜의 해양 자원이 무궁무진하다. 황금을 비롯한 수많은 광물과 원유를 보유하고 있고, 동부 아마존으로 내려가며 밀림에는 밀림 생태계 자연이 보존하는 동식물, 약초 등 세계가 주목하는 친환경적인 자원이 넘친다. 국토의 60%가 아마존의 열대 우림 지대로 아마존 강은 페루의 안데스를 발원으로 시작되어 남미의 모든 매력이 가미되어 있는 강이다.
예전에 남미 최대 제국을 건설했던 잉카를 포함하여 페루에는 기원전부터 몇 개의 고대문명이 꽃피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페루는 아직 남미 국가들 중에서 경제적인 중요성이 미약한 듯하지만, 이와같은 자연과 문화 유산을 비롯한 현대 시장성과 개발 가능성에 있어서 남미의 다른 나라들에 절대 뒤지지 않는 남미의 주요국에 속한다.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와는 또 다른 인종적 특징을 지녀 50% 이상이 인디오이고 20~30%의 메스티조, 그 외는 백인 아시아계로 이루어진다. 그래서인지 친근한 느낌이 드는 얼굴 생김과 피부색, 자그마한 키를 지닌 사람들이 대부분 이들의 전통 복장을 입고 생활하고 있어 길거리 분위기가 개성있고 독특하다. 카톨릭 신자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화폐 단위는 솔(sol)이다.
수도인 리마는 잉카 유적지가 있는 쿠스코와 맞추피추를 다녀 온 후 둘러보기로 하고 아침 일찍 쿠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새벽 4시가 다 되어 잠자리에 든 후 2시간만에 다시 기상하여 준비하려니 몸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남미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잉카를 드디어 보러 간다는 기대감에 힘을 모았다.
9시 50분발 LP 033편을 예약했기에 호텔에서 7시 45분에 출발했다. 10시 10분에 이륙한 비행기에서 밖을 구경할 겨를도 없이 비몽사몽인 가운데 보낸 한 시간을 노란색의 잉카콜라(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코카콜라가 이곳에서는 참패를 당한 원인이 된 바로 그 음료)로 깨우며 착륙 직전 내려다 본 쿠스코. 그 쿠스코는 스페인화 된 붉은 지붕과 자로 잰 듯한 도시 형태가 누가 봐도 완벽한 계획 도시의 면모를 보인다.
공항의 분위기 역시 잉카의 도시답다. 바람결에 떨리듯, 흐느끼듯 속삭이는 인디오의 멜로디가 차량고, 케나, 사포냐와 북소리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아침 공기를 가른다. 몇 가지 토산 기념품을 든 어린, 가난한 모습의 장사꾼들이 따라 붙으며 사라고 외치는 것도 남미 여행 중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풍경이다. 웅성대며 왁자한 소음과 함께 활기가 넘친다.
쿠스코는 리마에서 남동쪽으로 1,200Km 떨어진 안데스 산맥 해발 3,470m의 지역에 위치한 고원도시이다. 서기 1,000년 경 티티카카 호수의 ‘태양의 섬’에서 탄생한 잉카의 아버지 망코 카파크가 ‘배꼽(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 쿠스코에 도착하여 잉카(‘왕’이라는 뜻) 제국을 건설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로 이곳의 역사는 시작된다. 인구 40만으로 안데스 산악지대의 농목축업, 상업 및 교통의 중심지이다. 1533년 피사로를 비롯한 스페인인들에게 정복되었으나 번영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던 당시의 쿠스코는 정연한 시가지, 아름다운 건물, 거대한 신전 등으로 정복자를 놀라게 하였다. 정복된 후, 해안지방에 현재의 수도인 리마시가 건설되자 수도로서의 기능을 빼앗겼지만 아직도 시내와 교외에는 잉카 제국의 유적이 많고 연구자나 여행자의 메카 구실을 한다.
주민의 대부분은 잉카의 자손인 인디오이고 수공업적인 면, 모직물, 피혁가공 외에 경공업도 발달하였다. 모엔드항으로 통하는 철도가 있고 리마와는 자동차도로와 항공로로 이어진다.
공항을 빠져나와 첫 방문지인 산토 도밍고 성당을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 벌써 머리가 흔들리며 띵하다는 사람이 나온다. 고소에서의 산소 결핍으로 생기는 증세이다. 난 멕시코시티에서의 옅은 고소증을 경험한 터라 걱정이 되어 엊저녁에 고소 적응을 돕는 약을 미리 먹고, 물도 계속 마신 탓인지 아직 괜찮다.
쿠스코
쿠스코
우리나라의 조선왕조보다 늦게 건국된 잉카왕국이 고조선의 건국신화만큼이나 환상적인 신화와 더불어 발전해 오다가 왕국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9대 왕 빠차꾸떽이 즉위했던 1438년 전후였다.
물론 잉카족들은 일행을 거느린 초대 왕 망코 카파크가 계곡 사이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려 있는 지점을 향해 던진 황금 지팡이가 꽂혔다는 이곳에 정착한 이후로 이 쿠스코 골짜기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 이전의 그곳에는 끼이께라는 이름의 문명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 문명의 뒤를 이어 나타난 잉카가 쿠스코 골짜기 내의 작은 부족국가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젊은 왕자 빠차꾸떽이 찬까족의 침략을 막아 낸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당시 중부 산악지역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찬까족은 15세기 초 남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아뿌리막 강을 건너 쿠스코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에 겁을 먹은 당시의 왕이었던 8대 뷔라코차 잉카왕은 남쪽으로 도망가고,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가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며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빠차꾸떽 왕자가 용감하게 싸움터로 달려나갔다. 격전 끝에 찬까족을 물리친 빠차꾸떽 왕자는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왕이 피난해 있는 깔까로 가서 승리의 의식을 행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들을 오해하고 다른 아들인 우르꼬에게 왕위를 넘기고 싶었던 왕은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것을 알고 빠차꾸떽은 그곳을 벗어나 무사히 쿠스코로 돌아와 잉카의 실질적인 지도자, 9대 왕이 되었다.
1428년 새로운 왕이 된 빠차꾸떽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시내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는 진흙으로 자신이 원하는 도시 모형을 만들고, 건축가들에게 모형에 따라 도시를 새로 정비할 것을 명령했다. 빠차꾸떽은 우선 태양신을 모실 신전을 세우기로 하고, 잉카의 선조들이 처음 정착했던 장소에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를 세웠다. 이곳이 오늘날의 산토 도밍고 성당이 서 있는 곳이다. 신전을 짓고 그 안에 태양신의 상, 달의 신의 상, 천둥번개신의 상, 무지개신의 상 등을 만들어 놓고, 500명의 처녀들과 200명의 남자들을 선발해 신전 일을 돌보도록 했다. 쿠스코의 잉카건물 중에서 현재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고 그 내부의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은 이곳 태양신교의 총 본산인 코리칸차, 태양의 신전이다.
쿠스코 점령 이후 피사로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쿠스코의 주요 건물을 한 채씩 나누어 주었는데, 이 코리칸차는 그의 동생 후앙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후앙은 망고 잉카의 쿠스코 공격 때 삭사이와망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서 사망했고, 이 건물은 그의 유언에 따라 도미니카 선교회에 기부되었다. 선교회에서는 이 건물을 대충 부순 다음 그 위에 터를 닦고 벽돌을 쌓아 1535년에 산토 도밍고 성당을 세웠고, 그로써 코리칸차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로부터 아주 오랜 후, 1950년 페루에는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스페인인이 지은 산토 도밍고 성당은 주저앉아 버렸는데 그 밑에서 끄떡도 하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는 코리칸차의 검은 돌벽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 신전의 초석은 쿠스코 대지진에도 건재할 만큼 그 튼튼함과 정교함이 증명된 셈이다. 이후 페루의 고고학계와 종교계는 코리칸차 복원과 하느님의 집인 성당 복원의 선택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성당 내부에 유적지 관람코스를 두는 것으로 낙찰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코리칸차의 초석 위에 하얀 색으로 재건된 산토 도밍고 성당은 쿠스코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성당이 되었고, 더불어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아직 발굴 작업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코리칸차 건물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는 산토 도밍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약해 어두컴컴한 전시실과 천주교 성당을 둘러 보았다. 피사로 일행이 이곳을 점령할 당시 이 신전의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의 빛으로 신전 내부가 빛나고 있었다는 어느 스페인 정복자의 글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금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고 잉카식으로 변질한 가톨릭의 종교화의 액자와 일부 조형물만이 황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성당의 실질적인 주인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시자, 도미니코 성인의 잉태에서부터 성인 반열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 방을 지나 쿠스코 출신의 화가들이 그려서 그린 사람의 싸인이 없다는 각종 종교화가 벽면 가득히 게시되어 있는 전시실을 둘러 보았다. 종교화는 총, 칼을 들고 있는 천사, 잉카 왕비의 얼굴과 접목시킨 성모마리아 그림 등 이곳 현지인들이 친근감을 느끼고 쉽게 이해하여서 그들을 교화시키기 좋게 그렸다는 점에서 초기 선교 시절의 수도회의 노력의 흔적으로 보여 흥미있었다.
‘세드로’라고 하는 정글에서 자라는 나무는 목질이 빈틈없고 부드러우며 벌레먹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 그곳에 정교한 조각을 하고 금물을 들이거나 금박을 입혀 기둥을 만들고 액자틀을 짜서 아주 화려해 보였다.
태양의 신전은 지금의 성당이 있는 자리이고 태양신의 신상이 모셔져 있던 바로 그 자리 위에 현재의 감실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달의 신전과 별의 신전은 벽면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각기 모양과 크기가 다른 돌들이 2~3도의 경사각을 안쪽으로 이루며 서 있고 모서리는 통돌이 2벽면까지 에워싸인 형태로 짜맞추어져 어떠한 힘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서 있었다. 출입문은 피라미드 사다리공법이라는 방법으로 쌓았고 양 옆으로는 홈을 파고 나무를 끼워 문을 매달았던 경첩 단 자리가 깨진 채로 남아 있다. 벽에 파 놓은 벽감(니초라고 함)의 난간에는 신들을 만들어 올려놓거나 곡물을 저장했다고 하는데 한 벽면에 3 ~ 5개씩 양쪽 벽면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출입문쪽 벽은 창문이 나 있는데 그리로 비치는 햇살의 방향, 기울기 모양으로 절기, 기후를 측정했다고 한다.
이어 여러 돌이 쌓여 있는 전시실로 이동하였다. 신전을 허물어낸 짜투리돌들을 잉카의 건축 원리 이해를 돕기 위한 전시물로 만들어, 코리칸차 신전을 복원한 모형도와 함께 전시하고 있는 방이다.
요철 암수공법, 쐐기를 박아 힘을 분산시키고 퍼즐 방식으로 짜맞추기한 돌벽에서 떨어져 나온 돌, 홈을 파고 그 홈에 주물을 넣고, 베아링 쐐기를 박아 좌우의 흔들림을 방지했다는 돌들을 직접 보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역학적, 물리학적, 기하학적인 정교한 솜씨로 돌을 다룬 잉카인의 뛰어난 석조 건축기술에 찬사를 금할 길이 없다. 땀보마차이에 지금도 남아 있다는 돌로 만든 수로 파이프, 바하부라부라는 풀로 지붕을 엮은 완벽한 모습의 신전 복원도가 과거 잉카인의 숨결로 내게 다가온다.
천둥, 번개의 신전과 무지개 신전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특히 이 신전들 벽마다 수평으로 연결되는 위치에 창 3개를 내었는데, 창을 바라보며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그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치한 돌의자에 올라서면 하늘로부터 내려온 빛이 제사장인 왕을 무지개빛으로 비춰 주어 땅과 하늘의 연결자로 왕의 위격을 높여 보이도록 하였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페루는 공식적인 국기 이외에 잉카의 깃발인 무지개 깃발도 나란히 게양하는데 그 무지개 깃발의 내력이 이들 신화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신전 가운데 마당에 있는 통돌을 깎아 우물처럼 만든 제단이 있었는데 퓨마의 생식기 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잉카의 힘의 중앙을 의미하며 잉카십자가 모양의 우물 안에는 치차잎을 가득 채워 제사 때에 그 물을 나누어 마셨다고 한다. 햇살이 들어가도록 동쪽 방향의 벽과 뚜껑에는 홈이 파져 있고 남쪽 우물벽 아래쪽은 물이 흘러나오도록 구멍이 있고 우물 외곽 바닥은 물빠짐이 잘 되도록 홈을 파 놓았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통돌을 깎은 것이라고 한다. 제사때 뚜껑을 열어 동서남북으로 풍요를 기원하였다고 하는데 네 방향의 잉카십자가는 좌우 끝 천상세계와 상하 끝 지하세계를 연결하는 가운데 돌출이 현실세계를 의미하는 겹십자가 모양인데 죽은 후 콘돌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는 윤회 사상이 깔려있는 모양이란다. 이러한 윤회 개념은 왕이 죽으면 다시 돌아와 살도록 왕궁을 살던 그대로 남겨놓고 새 왕은 새 왕궁을 지어 거주했다는 점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신전 벽면과 천장을 장식한 황금판, 미이라로 만든 역대 왕들의 황금의자, 신전 출입구의 황금문, 마당에 있는 분수에 물을 공급한 황금수도꼭지, 정원의 온갖 종류의 동물들과 나무들, 꽃들, 곤충들, 새, 뱀, 도마뱀, 달팽이에 이르기까지 실제 크기의 금과 은으로 만든 자연의 모형, 황금으로 만든 옥수수들, 온갖 곡식들, 과일나무들, 야마와 알파카, 실제 크기의 농부들, 여자들, 아이들의 상까지 금과 은으로 만들어 놓았었다는 이곳에 대한 기록을 볼 때 얼마나 많은 양의 금은이 이곳으로 보내졌을까 상상이 안 된다. 황금에 눈이 먼 정복자들의 욕심에 찬 발걸음들이 건물의 훌륭함과 그 의미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금, 금, 금의 탈취에만 급급해 눈동자들을 희번덕였을 당시의 모습이 상상되어 안타까왔다. 황금의 구역이라는 뜻으로 이곳의 이름도 ‘코리(금)+칸차(마당,정원)’로 지었으니 당시의 화려했을 잉카의 힘의 원천지, 코리칸차 신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잉카 시대의 와이나 카파크 궁전터에는 라콤파냐 헤수스 교회가 자리잡았고 태양 처녀의 집은 산타 카타리나 사원으로, 코리칸차 신전 뒤쪽의 왕궁터는 LIBERTADOR HOTEL로 변모해 있어 세월의 무상감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이곳의 화폐 단위가 태양을 뜻하는 ‘솔(sol)'인 것처럼 쿠스코 곳곳이 태양과 관련이 깊다. 태양의 거리와 이어지는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왔다. 잉카 제국 당시에 이곳에서 모든 축제가 벌어졌다는데 현재 남아 있는 광장의 두 배 크기로, 아우까이빠따라고 불려졌던 현재 남아 있는 광장은 보다 신성한 곳이었고, 사라진 광장은 꾸시빠따라고 불려졌었다. 두 광장 사이에는 지금은 복개된 와따나이강이 흘렀고, 강 위에는 운판으로 다리를 놓아 그 위로 영롱한 물빛이 비치게 하면서 두 광장이 하나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며, 광장의 바닥에는 새하얀 바닷모래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광장에서 방사선 형태로 나 있는 골목길은 잉카 건축물의 특징인 지진에 대비해 약간 안쪽으로 좁혀가면서 비스듬히 쌓은, 면도날 하나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돌담 위로 유럽풍,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오랜 세월을 사람들의 발에 밟혀서 반질반질해진 돌길 위를 온통 우리 나라의 티코 일색의 택시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광장 한가운데는 예쁜 화단이 조성되어 있고 여기저기 놓인 벤치에는 한가하게 앉아 있는 몇몇 전통 복장을 입은 노인네들이 지나가는 사람과 차량을 구경하고 있다. 도로옆 가장자리는 회랑으로 연결된 건물들이 운치있게 이어져 있었는데 아래층은 주로 기념품을 파는 선물 가게, 환전소들이 자리잡았고, 위층은 개성을 한껏 발휘해 치장한 까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 건물들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건물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 대성당도 잉카의 비라코차 신전이 있던 자리에 스페인인들이 지은 것이다.
낮시간인 지금은 무척 한산해 보이지만 밤이면 몰려든 관광객과 시민들을 유혹하는 불빛들이 광장을 화려하게 수놓고, 기념품 몇 가지를 들고 다니며 호객하는 장사꾼들과 갖가지 벌어지는 길거리 행사로 시끌벅적하게 북적댄다니 그 낭만을 꼭 체험해 봐야겠다.
중앙 광장 근처에 있는 식당인 INKA'S WALL에서 고소한 빵과 따끈한 야채 스프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고소증에 좋다는 비릿한 맛의 코카차도 마셨다. 코카차를 병에 넣어주는 서비스까지 특별히 받은 후 현대 쿠스코의 진면목과 페루인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재래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길거리 건물 중 특기할 만한 것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해 준다. 시몽 볼리바르가 세웠다는 과학 영재학교인 씨앤시어스 학교(지금은 일반 공립으로 바뀜), 쿠스코 프로 축구팀의 대형 축구장인 씨앤씨아노, 무지개 깃발이 펄럭이는 쿠스코 시청, 1990년 후지모리 대통령 때 기능을 발휘했다는 국세청 건물, 봉쇄 수녀원 등.
시장은 규모가 무척 컸다. 말린 감자, 각종 향신료, 과일, 채소, 생선, 곡식 등의 생필품들이 넘쳐나고 부채처럼 옆으로 넓게 퍼진 주름치마에 갈래 머리를 쫑쫑 땋아내리고 어깨에는 이들의 전통 무늬로 예쁘게 짠 화려한 무늬의 스카프를 두른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저울에 물건을 달면서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물건들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 없는 시장이다. 버젓하게 가판대에 물건을 쌓기도 하고, 진열도 해 놓은 상점에는 의자에 높이 앉은 주인들이 큰 소리로 시끄럽게 호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손님들은 건성으로 보면서 졸거나 자기들끼리 떠드는 주인들도 있다.
그 상점들 언저리에 쪼그려 앉아서 얼마 안 되는 과일, 생선을 앞에 놓고 지나가는 손님의 눈치만 애타게 쳐다보는 초라한 모습의 장사꾼, 그들 품이나 등에는 어린 아기가 땟국 자국 남아있는 얼굴을 천진하게 드러내고서 자고 있거나 주위를 호기심에 가득 차서 이리저리 살피면서 매달리 듯 업혀있다. 누나 옆에서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공책에 열심히 글씨를 쓰는 어린 아이의 반짝이는 눈과 반들거리는 붉은 뺨은 어린 시절의 우리들 모습을 보는 것처럼 낯익다. 얼굴 생김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다. 과거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의 모습이 이곳에 그대로 있었고, 이들의 현재의 삶의 모습이 이 시장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전통 복장의 하얀 갈래머리를 한 인물 고운 할머니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이 할머니 몹시 화를 낸다.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애걸하듯이 부탁했지만 점점 더 성을 내면서, 한사코 ‘노’였다. 이렇게 구경거리가 되기 싫은 자존심 강한 잉카 노인에게서 물러서자마자, 개구리를 튀기던가 날 것으로 그냥 저울에 달아 판다는 상점의 아주머니는 신기한 듯 쳐다보는 우리에게 신이 나서 파는 물건을 설명하다가 돈을 주면 사진도 찍게 해 주겠다고 했다. 좀더 약삭빠르게 세태에 젖은 장사꾼이다. 켜켜이 싸여있는 개구리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 장사꾼의 얼굴 표정이 싫어 카메라를 내리고 그냥 돌아섰다.
간식으로 먹을 토마토, 옥수수를 사고 있는데 갑자기 솨솨솨솨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어디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는다. 알고보니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의 빗줄기가 시장 건물의 높은 양철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는 소리였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이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린 시절 초가 지붕을 양철 지붕으로 고쳐 살던 고향의 친구집에서 듣던 그 소리와 겹쳐지면서 빗소리마저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이어서 도착한 삭사이와만 유적지는 그 제작연대나 용도, 제작 기술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같은 건축물이 있는 곳이다. 심지어 그 이름조차도 그 의미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아서 갖가지 소문만 나돌고 있는 형편이다.
망코 잉카가 스페인과 투쟁할 당시 수없이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 그 시체가 산같이 쌓였고, 그 시체들을 뜯어먹으려고 몰려든 매들이 포식을 했기 때문에 이 유적지의 이름이 삭사이와만, 즉 ‘날개를 펄럭이며 배부르게 먹은 매’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하늘의 메신저 독수리, 땅속을 지배하는 지혜의 상징 뱀과 더불어 땅위의 최고 권력자, 정의, 왕을 의미하는 퓨마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쿠스코가 퓨마의 모양대로 지어졌다고 믿으며 이 유적지가 퓨마의 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삭사이와만은 삭사우마, 즉 ‘점박이 얼룩무늬 머리’라는 말이 약간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원래 이 건축물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쿠스코를 방어하기 위해 지은 요새, 또는 성곽이라는 주장이 우세했었지만, 80년대의 발굴에서 제관들의 미이라가 발굴되면서부터 이곳이 종교적인 중심지였으리라는 주장이 점점 머리를 들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잉카인들이 종교적인 건물과 군사적인 건물들을 구분하지 않고 살았다는 주장이 매우 우세하다.
잉카와 스페인의 최후의 격전지였던 이곳에 잉카인의 한이 서려서인지 유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거센 바람과 함께 잉카의 눈물처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비옷을 갖춰 입고 잉카인의 돌쌓기 건축술의 백미인 삭사이와만 유적지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해발 3,500m에 위치한 탓인지 고소증으로 인해 머리가 아프다, 다리에 쥐가 난다, 가슴이 답답하다, 여러 유형의 증상들을 호소하며 일행들이 힘들어 한다. 아예 유적지에 올라갈 엄두를 못내고 버스에 누워버린 사람도 있다. 신영씨도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괜찮다.
22회의 구불구불한 지그재그를 그리며 3단으로 쌓여진 성벽의 길이는 366m, 맨 아래층에는 22개의 톱니같이 뛰어나온 부분이 있고 벽의 높이는 약 6.5m, 그 위의 두 번째 벽의 높이는 약 5m, 맨 윗벽의 높이는 약 2.8m이다. 위쪽으로 갈수록 돌의 크기는 작아지며, 맨 아래층의 성벽에는 길이 11.6m, 높이 5.5m, 두께 2m에 달하는 바위가 쓰였는가 하면, 8.5m 높이에 약 360톤의 무게가 나가는 돌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나하나 자연스런 돌모양이면서도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정교한 접합, 크고 작은 다양한 돌이 빚어내는 최고의 균형감, 비례감을 지닌 미술적 아름다움, 한쪽 벽에서 모서리를 지나 다음 벽까지 하나의 돌로 이어진 과학적, 역학적 효과의 최대 묘기, 사다리꼴 모양의 출입문, 뱀머리 홈, 공작새 모양, 3면에 걸쳐 이루어진 거대한 뱀. 무심코 얹어놓은 돌담 같은데 자세히 보면 이처럼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는 짙은쑥색 섬록암, 멀리서 날라온 검정색 안산암, 회색 석회암들이 내 넋을 뺏는다. 쇠로 된 도구나 바퀴, 힘센 동물들을 이용하지 않았던 잉카인들이 돌도끼로 바위를 다듬고 사람의 힘으로 이 어마어마한 돌을 날랐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돌을 다루는 그들의 기술이 궁금하기만 하다.
돌에 표정이 있고 이야기가 녹아 있는 줄 내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하루 2만여 명씩 동원된 인원이 8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는 이 어마어마한 돌의 파도를 따라 더듬으며 걷고 있자니 수많은 돌들의 이야기, 그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외침으로 들리는 그들의 신화와 역사를 새기며 세 개의 문을 지나 정상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맑은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한다. 멀리 붉은 지붕들로 이어진 쿠스코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퓨마의 형태를 찾아보려 애써 보지만 산꼭대기까지 들어선 붉은 지붕들이 잉카의 쿠스코의 경계선을 허물고 있어 어려웠다.
정상에는 건물터들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에 세 개의 탑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이 탑 안에는 수로로 연결된 샘이 있어서 물이 흘러 나왔고 이 물을 모으는 저수지가 있었는데, 약 3km 떨어진 차칸 저수지로부터 수로를 통해 흘러왔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이 수로는 직경이 약 12cm이고 중간에는 중간 공급저수지가 있었으며, 수직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관, ㄱ자 모양의 관, 연결부 등이 발굴되었단다. 탑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곳을 보니 주춧돌이 깔려 있고 네모로 움푹 패인 함정같은 작은 공간이 있었다. 기록에는 이곳의 지하로 미로 같은 지하통로가 나 있고 쿠스코의 비밀장소와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고 하나 흔적들은 보이지 않고, 파괴된 돌들은 얼마 전까지도 민간인들이 가져다가 자기들의 집을 짓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꼭대기에는 해시계를 설치해 놓고 당시 주요 농작물이던 감자, 옥수수 재배나 수확 시기를 가늠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유적지에서는 매년 6월 24일이면 ‘인티라이미’라고 하는 태양제가 열려 잉카 의식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한다. 이 축제는 브라질 리오의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르로와 함께 세계 3대 축제로 알려져 있다.
삭사이와만에서 5km를 버스로 달려‘미로’라는 뜻을 가진 겐코에 도착했을 때는 잠깐 멈추었던 비바람이 더 거세지고 몹시 추워졌다. 이곳은 장례식을 거행하고, 미이라를 제작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삭사이와만은 다른 지역에서 운반해 온 돌로 축조한 거대한 유적지인데 반해 겐코는 그 지역에 있는 석회암 지형지물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규모가 작고 소박한 곳이다. 장례 의식을 지켜 보는 돌의자가 잉카의 상징적 숫자인 3단 계단 위에 우뚝 있고, 미이라를 제작한 돌, 안치한 돌, 제물을 올리는 제단 등이 바위 속 동굴 안에 썰렁한 냉기를 머금고 누워 있다. 미이라는 쭈그려 앉은 모양이 어머니 뱃속의 태아를 닮았는데 탄생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여 죽음 후의 평온한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런 모양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에쿠아도르와 페루 북부에 사는 아마존 부족인 찬사 부족은 산성 성분의 약초를 사용하여 시체를 줄이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앉은 자세로 위, 아래로 줄인 자그마한 미이라들이 이곳은 물론 잉카의 영역이었던 해안 사막지역에서 특히 많이 발굴된다고.
겐코
겐코
겐코
뿌까뿌까라는 ‘붉은 요새’라는 뜻을 가진 이름처럼 붉은 색의 돌로 만들었는데 일종의 콘트롤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명령을 부족에게 전하는 사람인 ‘차스키(파발)’를 내보내고 중앙 왕궁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관리하였던 곳으로 우편배달부 노릇을 하는 차스키들이 머물기도 한 일종의 역참 역할을 하던 통신 시설이다. 차스키는 왕족의 자제를 훈련시켜 리마에서 쿠스코까지의 1,280km의 거리를 파발로 연결해 중앙 정부의 주요 문서,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주요 임무를 띤 사람으로 해변에서 잡은 싱싱한 생선을 그날 중으로 왕의 식탁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고 빠르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뿌까뿌까라
붉은 벽체만 남은 그곳을 차창으로 내다보면서 지난 후 ‘성스러운 샘’이라는 땀보 마차이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잉카 시대의 목욕탕 역할을 한 곳으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언제나 일정량의 물이 항상 솟아나오는데 지금도 끊임없이 흐르는 이 물의 근원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삭사이후아만, 겐코 등 주변 유적지와 모두 연결된 지역으로 제를 지내기 전에 몸을 정결하게 할 수 있도록 위에서 흐르는 샘이 세 단계를 거쳐 밑으로 흐르게 만들어 놓았는데 마르지 않고 흐르는 이러한 물을 찾아 이용한 지혜도 대단하지만, 물길따라 휘어진 돌을 써서 물길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니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갑다.
땀보 마차이
땀보 마차이
돌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거의 신적인 천재성을 발휘했던 조상을 둔 후예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조잡한 기념품이나 스웨터, 숄을 들고서‘one dollar!', ’알파카!‘를 외치며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돈벌이 투쟁을 하고 있다.
슬슬 고소증 증세가 와서 빨리 걸으면 머리가 흔들흔들 했으나 걸어서 왕복 30분 이상의 길을 무난히 소화했다. 이곳의 고도가 3,860m이고 비행기에서 갑자기 높은 지역에 내려 적응할 사이 없이 바로 이어진 일정이라 고소증 증세가 심한 것 같다. 모든 탐방을 포기한 일행이 꽤 많이 있어 안타까왔다.
이어 우루밤바 계곡을 따라 깎아지른 절벽과도 같은 피삭 지역을 구불구불 내려갔다. 내일의 맞추피추를 위해 이곳보다 고도가 낮은 우루밤바(해발 2,800m)에서 고도 적응을 하기 위해서이다. 잉카의 왕족을 먹여 살렸다는 농작물을 생산하는 신성한 계곡으로 인식하여 온 계단식 경작지를 바라보았다. 주변 지형을 이용해 농사지었던 축대 쌓은 계단식 밭은 놀랍다못해 경이로운 수준이다. 1년 3모작도 가능하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기후에 따라 감자, 콩, 옥수수 재배를 하여 잉카의 풍요를 누렸다는 이 계곡에는 지금도 싱그럽게 자라나는 농작물들이 바람결에 날리며 수확의 풍요로움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풍요를 가꾸는 이면에 숨어있는 잉카의 후예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였다.
버스로 내려가서 볼 수는 없지만 정복전쟁을 벌이며 전쟁과 함께 살았던 잉카인들이 삐삭 언덕 꼭대기에 세웠던 요새인 피삭 유적지, 계단식 밭 위에 있는, 파수대 역할을 했던 창문을 가진 반원형, 타원형, 원형의 건물 우이민, 봉수대 같은 꼬리와이라치나 등의 여러 유적들이 이 계곡에는 산재해 있다고 한다.
19시경 우루밤바에 있는 호텔 LA CASONA DE YUCAY에 피곤한 여장을 풀었다. 이곳은 볼리바르 장군의 독립 운동 당시 임시 군인 주둔지였고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라 했다.
고소증에 시달린 일행 몇 분은 호텔에 비치된 산소통의 도움을 받았고 절대적인 수면 부족 상태인 우리들은 이들의 빠른 쾌유를 빌 새도 없이, 좋아하는 산속의 풍경도 보는 둥 마는 둥 저녁 식사 후 그대로 잠에 곯아 떨어졌다.
방에는 난방을 위한 히터가 있어 방안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루밤바
우루밤바
라마
오늘의 일정 : - 7시 45분 호텔 출발
- 쿠스코행 LP 033 탑승 10시 10분 이륙.1시간 후 쿠스코 공항 도착
- 산토 도밍고 교회, 태양의 거리, 아르마스 광장
- 페루 전통 식당 INKA'S WALL에서 점심 식사
- 재래 시장 방문 후 삭사이후아만, 겐코, 땀보 마차이 탐방
- 피삭 계곡을 달려 우루밤바에 오후 7시 도착
- LA CASONA DE YUCAY HOTEL 350호실 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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