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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다리
아르헨티나(5) - 부에노스 아이레스 본문
14일차 (1/25.목)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픔
오늘은 유럽인들이 남미의 파리를 꿈꾸며 건설한 계획 도시,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유명한 곳을 둘러 본 후 중남미 여행의 하이라이트, 잉카의 나라 페루로 입성하게 된다.
6시 기상. 자료집 보며 여유롭게 아침 시간을 보냈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려 마음이 심란하다. 6층 객실에서 듣는 비내리는 소리, 윙윙대는 바람소리는 나그네의 심회를 자극한다. 비 내리지 말고 흐리기만 해 준다면, 내리더라도 우산 쓰지 않을 정도만 된다면 좋으련만. 우산 쓰고 비 맞으며 시내 관광이라니, 보카 지구는 색상의 화려함이 특징이라면 그 지역의 풍취를 미술적으로 제대로 느끼려면 화창해야 할 텐데.
시리얼과 요구르트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에 호텔을 나왔다. 출근 시간대를 넘어서서인지 길거리는 대도시답지 않게 한산한 편이다. 도시의 중심부인 5월 광장에 도착했다.
5월 광장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스페인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르헨티나 독립의 첫걸음이 된 18세기 초의 5월혁명을 비롯하여 파란만장한 정치적 사건의 무대가 되어 왔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대통령 취임식 등 다양한 정치적 주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광장 중앙에는 5월혁명 1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5월의 탑이 있는데 탑 속에는 아르헨티나 각지에서 수집한 상징적인 흙이 탑 속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독립운동 당시의 영웅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의 기마상이 있으며 광장 앞쪽에 대통령궁이 있었다.
수리중이어서 얼기설기 공사를 위해 얽어놓은 난간들로 인해 대통령궁은 전면을 시원스레 볼 수도 없고, 가까이 접근하기도 어려웠지만 에비타가 대중 연설을 했다는 발코니가 정면 왼쪽편으로 보였다. 이 나라 국민의 뼈 속까지 박혀있는 포퓰리즘 정치의 출발점을 제공했던, 그로 인해 페론 정부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아르헨티나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만든‘대중의 어머니, 악녀이며 천사’로 불리우는 에비타의 해맑은, 예쁜 얼굴이 저 발코니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대통령궁 좌측으로 1876년에 완공하였고 그 이후로부터 금을 아주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중앙은행이, 광장 맞은편으로는 하얀색 첨탑의 독립기념관 건물이 보였고, 좌측으로는 단순한 듯하면서도 화려하고 웅장한 대성당이 우뚝 서 있다.
대통령 궁
5월 광장
5월 광장
대성당 건물 앞에 섰을 때 성당의 도로쪽 벽면에 설치한 시설물에서 봉화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독립을 위해 희생한 영혼을 기념하는 봉화불이 일 년 내내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고 한다. 성당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는데 산 마르틴 장군과 관계있는 성당이어서 그렇겠구나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12사도를 상징하는 12개의 멋진 대리석 기둥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유럽의 큰 성당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깔았다는 바닥의 모자이크는 인상적이었다. 1605년에 건립을 시작해 완성하는데 5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작은 조각들을 7cm 깊이로 박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장식성이 뛰어난 섬세하고 아름다운 바닥의 조각만 보아도 이 성당에 쏟은 당시 정부와 국민의 정성됨이 어느 정도인지, 그 당시의 국력, 재력이 얼마나 든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채플실 하나 하나를, 천장 벽화를 , 벽면 그림,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둘러본 후 고통의 십자가상 앞에서 전율같은 뭉클한 감동을 느끼고 잠깐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반대쪽 회랑이 술렁대고 있어 일어나 그리로 가 보았다.
근위병 4명이 엄숙한 절차에 의해 무언가 의식을 행하고 있다. 아니, 성당에 웬 근위병? 의식이 치러지는 방에는 남미 해방의 아버지인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1778년에 탄생한, 가톨릭 신자가 아닌 마르틴 장군이 성인이라고?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의 남미 해방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존경심이 얼마나 대단하면 그의 유해를 성당 안에 모시고, 성인으로 추대하고, 매일 이같이 국가 수준의 의전 예식을 치른 후 관람객과 추모객을 들여보내 그에 대한 예우, 추모를 하도록 하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독립기념비의 4면을 돌아가며 그의 공적이 빽빽히 적혀 있다. 이 장소는 안에서는 성당과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밖에서 보면 성당과 구별되는 별도의 건물이란다. 밖에 나와 바라보니 성당 건물 뒤쪽으로 푸른 돔의 지붕을 가진 별도의 건물이 성당과 붙어 있었다.
그들 임의로 존경의 마음을 카톨릭 신자가 아닌 그에게 카톨릭 성인에게 부여하는‘Saint'이라는 호칭에 담고, 카톨릭 사제나 존경스런 신자들의 유해만을 모시는 성당에 직접 모실 수 없어 성당에 붙여 건립한 별채에 유해를 안치함으로써 성당에 모신 유해와 같은 신의 은총을 받도록 한 이들에게 산 마르틴 장군은 어떤 존재인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유럽의 계몽사상은 라틴 아메리카에도 큰 영향을 주어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독립의 희망은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퍼져나갔다. 거기에 덧붙여 식민지 본국인 스페인이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며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스페인의 본토우선주의, 중상주의 정책은 식민지 태생의 많은 스페인인(크리오요)들에게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려 하기보다는 스페인 왕실의 개인 금고처럼 여겼고, 본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식민지로 수입되는 외국의 물산에 대해 높은 관세 정책을 유지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상품 중 본국의 상품과 경쟁이 될만한 것들은 생산을 중지시켰다. 스페인 본국의 이런 태도는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어쨌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살아야 하는 크리오요들에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각성한 식민지인들에게 본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정치적 실권을 행사할 수 없는 모순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한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대열의 선두에 나선 남미 해방의 두 영웅이 시몬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이다.
“우리는 인디오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럽인도 아니다. 스페인 인이란 정체성을 벗고 라틴 아 메리카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독립의 구호로 외치며 볼리바르 장군은 콜롬비아, 에쿠아도르, 페루 등 라틴 아메리카 북부, 마르틴 장군은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부 지역의 독립에 앞장선다. 그들은 정치적인 견해나 노선은 달랐지만 그들 사이에 아무런 유혈 사태 없이 라틴 아메리카 해방이란 대의에 충실했다.
볼리바르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고 새로운 공화국 수립을 주장한 반면, 산 마르틴은 사회혁명을 우려하여 왕실을 유지한 채 스페인과의 협상을 통한 독립을 원했다.
볼리바르 이하 독립의 선두들은 하나로 통일된 라틴 아메리카를 원했고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남미 북부 지역에서만큼은 ‘그란 콜롬비아’를 통해 그런 통일 상태가 유지되었다. 미국이 하나의 연방으로 커가고 있는데 라틴 아메리카가 분열될 경우엔 결국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대륙이 안은 지리적 소통의 어려움과 각 국가간의 서로 다른 인종 혼혈, 지역 간 대립, 그들의 통합을 원치 않았던 미국과 영국의 분열정책으로 결국 20여 개 국가로 분열되고 영웅들의 이상은 좌절되었다. 그 좌절감은 산 마르틴의 침상에서 구술했다는 볼리바르의 묘비명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의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독립 국가이긴 하나 경제적 종속국이 되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의 아메리카 독립이나 해방에는 원주민들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고, 아직까지는 자신들을 스페인 인이라고 지칭하는 수준의 의식을 보인 점은 크리오요의 후손, 그들 중심의 스페인 혼혈인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사회 구조, 중간층이 배제된 상류(백인계)와 하류(원주민)의 양분화된 삶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오늘날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한다.
한편 마르틴 장군에 대한 예우가 이처럼 극진한 이유도 그의 정치 노선(왕실 인정)에서 찾을 수 있겠고, 통치권에 의해 국민들에게 과장되게 세뇌되었다는 인상이 강하게 풍겼다.
산마르틴 성당
산마르틴 성당
산마르틴 성당
산마르틴 성당
산마르틴 성당
버스에 우산을 두고 내린 탓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지하철역으로 갔다. 시민의 발이자 100년 된 나무로 만든 지하철 구경을 위해서이다. 1911년 개통된 지하철 1호선의 기착지이며 출발지인 5월광장역에서부터 이 도시의 모든 도로의 이정표 길이가 표시된다고 한다.
지하철 찻간은 서로 왕래가 안 되고 칸별로 막혀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흐릿한 백열 전구가 유일한 조명으로 인디오 계열이 강한 뚱뚱한 서민 몇이 앉은 틈새에 끼어 앉아(나무 의자) 5구간을 달렸다. 구간 거리가 아주 짧았고,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으나 시민의 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지하철역은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바로 매표소가 있고 바로 표를 넣는 출입구가 있어 여유 공간이 협소하였다. 러시 아워에는 매우 혼잡할 것 같았다. 잠시 지하철 체험을 한 후 1902년에 완공했다는 국회의사당이 있는 의사당역에서 내렸다.
지하철
비잔틴과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의사당 건물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후하고 위풍당당하면서도 고색창연함이 우리를 압도했다. 하지만 매우 낡은 모습이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는 기품있던 신사의 초라한 노년을 보는 것 같았다.
의사당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 사거리에 서 있는 ‘몰리뇨’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도 매우 독특하게 아름다워 눈길을 끄는데 어찌나 낡았는지 금방 쓰러질 것 같아 불안했다. 1880년에 지은 최초의 커피숍이란다. 곧 보수에 들어갈 거라니 다행이긴 한데 저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누군가 많은 투자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의사당 앞의 공원으로 꾸민 광장(산 마르틴 광장?)을 천천히 걸었다. 거기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유명인(산 마르틴?)의 상이 조각된 탑이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조각이 멋지게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세계에 7개 있는 로댕의 진품 ‘생각하는 사람’ 중 이곳의 작품이 특히 유명한 이유는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로댕이 한 때 아르헨티나에 머물렀던 기념으로 남긴 작품이라는데 이 엄청난 가격대의 예술품이 강한 햇볕 아래, 비를 맞고 추위를 견디며, 바람 소리를 친구삼아 시민들의 이웃으로 그들의 곁에 앉아 있다.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인간의 고뇌와 사색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우리와 같은 생각과 꿈을 키우며 대화할 수 있을 때 조각품은 이미 돌의 경지를 넘어 진정한 예술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은근한 시사점을 그 조각은 우리에게 던지는 것 같아 신선해 보였다.
국회
광장 바닥에 하얀 스카프
우리의 근대사의 격동기에 희생된 많은, 이름모를 사람들, 열사들, 그들의 어머니. 자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슬픔, 애도, 분노의 마음을 승화시켜 민주화의 대열에서 나라의 어머니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나라의 많은 어머니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희생이 값지게 빛나기 위해서도 진정한 자유, 정의, 평화, 복지, 행복이 이 땅에 구현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우리는 사명감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정차된 버스는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우리를 태우고 출발하려다 대형 사고를 냈다. 바로 앞에 여유 공간 없이 붙여서 주차(일렬주차)한 승용차를 피해 뒤로 후진하던 버스가 길가의 가로수를 들이받는 바람에 뒷좌석 창문이 깨져버린 것이다. 창문이 깨지는 굉음에 얼마나 놀랐던지. 긴 차체를 몇 번의 후진, 전진, 후진, 전진,... 후진하면서 연속적으로 나무에 유리창은 우지끈, 우지끈 부서진다.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멋진 벤츠 버스는 비닐막 창문으로 몰골이 흉측해진 채 달려야 했다.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웠던 버스같다.
어머니회 마크
이어 7월 9일 대로를 버스로 달리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 건립 400주년 기념으로 세웠다는 오벨리스크 탑을 보았고, 1889년 솔론에 의해 건립된 콜론 극장을 지났다. 스페인의 콜로니얼 공법으로 지은 집들의 조각된 기둥들이 돌출되어 있고 빌딩과 빌딩이 서로 30cm 정도의 공간을 두고 붙듯이 지어졌으며 8m60cm 이하로 높이를 제한한다는 도로변 빌딩들에 대해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이 들리다가 말다가 한다. 대로는 폭이 140m, 22차선 도로이고 지하는 주차장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의 수도에 있는 도로답게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시원스럽고 당당한 모습이고, 계획적으로 건설한 도시답게 세련된 건물들과 조경된 가로를 시민들은 바쁘게, 더러는 한가하게 걸어간다. 그러나 영락한 옛 귀족의 노화된, 풍상에 찌든 듯한 loose함이 전체적으로 느껴졌다. 이들이 침체의 늪을 벗어나서 과거의 영화를 당당하게 다시 살아내는 활기에 찬 그날을 기도하면서 처음 이곳에 도착해서 깔라파테로 가기 위해 공항을 향해 달렸던 그 길을 다시 지나갔다. 공과 대학, 튜울립꽃 광장, 스페인 광장, ..... 차창으로 부에노스 도시의 색깔과 냄새를 느끼며 레꼴레따 지역으로 이동했다.
우리도 그 까페 ‘La Biela'에 들어가 잠시 여유 시간을 가졌다. 여행 중 모처럼 가져본 여유로움이다. 꼬르타도(에스프레소에 우유를 탄 전통 커피)와 에스프레소를 시켰는데 내가 시킨 에스프레소 맛이 기가 막혔다. 비가 내리는 관계로 야외에서 차 마시는 운치를 못 누렸지만,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는 실루엣이 멋진 할머니 사진도 한 컷, 냅킨에 커피 이름과 커피숍 이름을 써서 초콜릿과 찻잔을 조화롭게 배치해 놓고 또 찰칵, 멋진 이 홍선희의 옆모습 포즈를 잡아 작품 사진을 찍는다고 찰칵, 신영씨와 장난치듯 치고받고 사진찍는 한가로움이 재미있었다.
주로 나이든 노인네들이 많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이곳 사람은 커피 한 잔을 놓고 2~3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급할 것 없이 느리게, 느리게 이렇게 사는 삶의 미덕도 익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아직 너무 젊고,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 건가? 여행지에서만 누릴 수 있는 시간의 호사가 너무 좋다. 분,초를 계산해야 하는 바쁜 일상을 잊을 수 있다는게.
카페
카페
레끌레타 묘지 입구에 있는 성당을 지나 1822년에 문화재로 인정되었다는 묘지 구역으로 들어서자 각종 석조물, 거기에 새겨진 조각품, 대리석 석상, 철제 장식 등으로 빽빽히 들어찬 건축물들 사이로 미로같은 길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일종의 가족묘지인데 아르헨티나의 내노라 하는 부자들의 납골당이다. 3~5평 정도의 묘지 가격이 웬만한 아파트 가격보다 비싸고 관리비도 엄청나서 가난한 서민은 이곳에 안치될 꿈은 아예 꿀 수도 없다고.
건축물 하나에 지하 1,2,3,…… 15m까지 관이 안치되었고 지상 윗부분은 장식물로 채워져 관리되고 있었다. 지체있는 집안, 돈 많은 집안 등이 확연히 구분되고 예술가들의 정교한 작품들이 빽빽한데 너무 많아 질릴 정도였다.
에비타 무덤도 그 중 한곳의 가족 묘지에 조용히, 소박하게 있었고 출입문에 꽂혀 있는 작은 조화가 어느 노동자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는 듯했다.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만큼이나 죽어서도 사연이 많았던 그녀 시신은 군부에 의해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돌아다니다가 에비타가 죽은 후에 페론과 결혼한 둘째 부인이었던 이사벨 페론 대통령의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 24년만에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그녀는 비천한 출생과 순탄하지 못하게 살아온 삶의 경로에서 은근히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갖게 되었고, 권력을 손에 쥔 후 그녀는 정책을 펼 때 가진 자에게 표독한 영부인으로 군림하여 악녀의 평까지 얻었다.
그녀의 헌신과 봉사는 개인의 정치적 욕심, 남편을 위한 내조도 아닌,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한 동지의식, 그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녀를 아르헨티나의 독재에 봉사하였고 노동자, 빈민 계급을 마취시킨 악녀라고 평하기에 앞서 바로 그녀의 이러한 진정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영화 <에비타>였다. 그 유명한 노래와 함께 우리의 가슴을 울렸던 영화 <에비타>는 어느 정도 그녀를 미화시킨 부분도 있지만 죽은 자에 대해 후한 것이 사람의 감정이 아닌가.
영화 <미션>의 시대적 배경인 남미전쟁, 그 전쟁을 기억하는 남미전쟁기념관, 학교 건립 등 업적이 많은 인텔리 대통령 사르멘또, 노벨화학상 수상자 R. LELOIR의 무덤 등 특징적인 건물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묘지를 돌아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스산하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는데 우린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이처럼 먼 길을 허위허위 달려 온 것인가. 죽음에 대한 경외감, 삶에 대한 겸손함, 존재에 대한 감사.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엄숙함에 물든 상태로 묘지를 벗어났다.
80~100평이나 되며 한 층에 한 가구만 거주한다는(하인과 주인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도 구분되어 있단다.) 대형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선 길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220년이나 되었다는 대형 고무나무를 보았다. 뻗은 뿌리만도 작은 동산 정도의 크기로 우리를 위압한다. 일행이 모두 늘어서도 나무 폭이 다 안 가려지고 뿌리 사이로 우리 모두를 감싸안는 자세이다.
기념 사진을 찍은 후 점심 식사를 위한 아사도 전문 식당, LA TRANQUERA로 갔다. 오후 2시의 늦은 점심이다.
내장구이 전채가 즉석 불 위에 구워지면서 나왔는데 소시지 모양으로 다양한 부위, 모양과 맛을 보이는 특색있는 요리였고, 소금으로만 간을 한 소갈비를 3시간에 걸쳐서 숯불에 굽는다는 아르헨티나 전통 음식인 아사도를 샐러드와 곁들여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역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음식답다.
후식으로 나온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는데 건너편 테이블에서 식사를 끝내고 있는 손님 일행 중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지난 여름 중앙아시아에서 19일간 같은 일행으로 움직였던 만물박사처럼 보이던 은퇴한 교장선생님이다. 성함은 생각이 안 났지만 이역만리에서 잠깐씩 만나는 인연이 매우 반가왔다.
레클레타 묘지
레클레타 묘지
레클레타 묘지
레클레타 묘지
레클레타 묘지
레클레타 묘지
점심 식사 후 4060평방 킬로미터나 되는 광대한 넓이(세계에서 가장 넓음)와 세계 3대 공원의 하나로 꼽힌다는 팔레르모 공원 지역을 이리저리 이동하던 버스는 장미의 정원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팔레르모 공원은 원래 독립 직후의 독재자 후안 데 마누엘 데 로사스 대통령의 사저였는데 1874년 공원으로 변경되어 장미원 플라네타리움, 경마장, 폴로 경기장, 골프장, 인공 호수 등의 시설물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47개 지구 중의 하나로 유럽 이민자의 꿈을 보여주는 지역이란다.
여체의 아름다움을 조각한 블론즈 조각은 사람들의 손길로 반들반들했다. 아르헨티나의 국화라는 붉은 색의 기품있는 꽃이 피어있는 곳을 지나 육교같은 흰색 전망대 구조물에 올라 정원 일대를 둘러본 후 입구 반대편의 출구로 나갔다.
장미공원
장미공원
장미공원
이윽고 찾아간 탱고의 발상지 보카 지구. 화려한 원색, 파스텔 톤 색채가 낡고 작은 집들의 벽면을 동화의 세계처럼 아기자기하게 물들이고 있는 지역. 센트로 남쪽의 산텔모 지구가 식민지 시대에 제일의 고급주택가였으나 1880년대 이후로는 이탈리아계 등의 이민족이 사는 서민의 동네로 바뀌었듯이 보카 지구도 이민 온 이주민들이 살던 항구인데 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흘러든 이 항구에는 보헤미안이나 예술가들이 모이는 이국적 정서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 옛날 어부와 부두 노동자들이 배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모아 집을 치장하면서 여러 색을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칼라풀한 벽면이 지금은 <카미니또>의 장소로 예술적인 감각을 발휘한 아름다운 배색으로 한 장의 그림엽서처럼 예쁘다. 실제로 이곳을 사진찍거나 그림으로 그린 엽서들은 환상적으로 예뻤다. 기념품 가게에는 항구, 선원, 주막, 밤의 여자, 사랑, 애환, 이별, 그리움, 좌절, 꿈 등의 단어를 연상시키는 이곳의 풍취가 물씬 풍기는 물건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어 아주 독특했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구경하는 재미만으로도 아주 괜찮았다.
보카지구
보카지구
보카지구
보카지구
오나시스 철교
마데라 항구의 구도시 지역을 버스로 이동하면서 선박왕 오나시스가 개발하여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게 만든 밑거름을 제공해 준 철교가 구조물로서의 아름다운 예술성을 발휘하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철교로 마차 탄 귀족들을 마차에 탄 채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옛날 항구의 부두 창고는 일부가 지금도 낡은 모습으로 창고역할을 하고 있지만 많이 개조, 보수하여 다른 용도로 바뀌어 사용된다고 한다. 관광용 대형 선박의 흰 돛대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새로 세운 멋진 새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하얀 다리와 항구는 무척 조화로웠다.
항만을 따라 아름다운 가로등과 함께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신도시 지역에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며 분양 광고도 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뒤돌아본 곳에는 푸른 하늘과 초록 숲을 배경으로한 국방부의 하얀 건물이 너무도 도도하고 당당하게 서 있어 아직 노병은 죽지 않았다는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느낌을 주어 인상적이었다.
보카 지역과 마데라 항구는 특별하고 독특하여 오래 인상에 남을 것 같다. 더구나 오락가락 가늘게 비내리는 날의 항구가 아니었던가. 시적인 운치가 넘치는 시간이었다.
마데라 항구
마데라 항구
마데라 항구
이제 아르헨티나의 여정은 여기서 끝난다. 아름다운 자연인 이과주, 파타고니아, 빙하국립공원이 있는 나라, 정글과 광활한 초원인 팜파스에서 생산되는 맛있는 자원이 넘치는 나라, 유서깊은 도시마다 한때의 영화로운 추억을 간직한 나라, 그 아르헨티나가 축구만이 아닌 다방면에서 남미의 자존심으로 우뚝 서기를 기도하면서 공항으로 향했다.
LP 428은 우리를 페루로 날라가기 위해 20시 10분으로 예정되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계속 지연되고 있단다. 어제 리마행 비행기는 출발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늦어지더라도 이륙만 한다면 감사할 일이다. 이곳은 남미이고, 이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는 예측 불허의 땅이 바로 남미라고 하는 곳이다.
여태 일정에 큰 차질 없이 여행이 진행되어 왔는데, 마지막 여행국가인 페루로의 입성이 힘들어지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페루의 어마어마함을 멋있게 드러내기 위한 긴장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비행기까지 가세하고 있는 건 아닐까?
비행기 지연으로 대기하는 동안 지급된 촉촉한 치즈,햄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여행 일지를 작성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2시간 정도를 기다린 보람이 있어 드디어 22시에 비행기는 활주로를 힘차게 달려 소리도 요란하게 리마를 향해 하늘로 이륙했다.
신영씨와 좌석이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5시간을 비행한 끝에 새벽 1시가 넘어 리마 공항에 내렸다. -14시간 시차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보다 2시간이 늦어진 시간이다. 어제의 3시가 넘은 시간대이니 얼마나 졸린지. SHERATON LIMA HOTEL에 도착했을 때가 새벽 2시. 샤워하고 짐 정리하다 보니 4시 가까이 되었다. 쿠스코로 이동하기 위해 아침 6시에 기상해야 한다. 잠깐 눈 붙이려고 침대에 누웠다. 물 먹은 솜처럼 온 몸이 천근 만근 늘어진다.
오늘의 일정 : - 9시 호텔 출발, 오월 광장으로 이동 - 대통령궁, 대성당
- 1호선 지하철 탑승 - 국회의사당, 산 마르틴 광장
- 7월 9일 대로를 지나 레끌레타 지구 - 티 타임
- 레끌레타 묘지(에비타 무덤)
- 아사도 전문 식당 LA TRANQUERA에서 점심 식사
- 팔레르모 지구의 장미의 정원
- 보카 지구와 마데라 항구
- LP 428 리마행 비행기 22시 이륙 새벽 1시 LIMA 도착
- SHERATON LIMA HOTEL 650호실에 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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