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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다리
멕시코(3) - 멕시코시티 본문
4일차 (1/15. 월) 멕시코시티는 여전히, 매우 속상하고 아쉽다
새벽 4시 기상. 3시간쯤 잤지만 깊이 자서인지 기분이 괜찮은데 꼬리뼈 오른쪽, 왼쪽 골반과 엉치가 개운하지 않다. 치첸이사에서 더운 기온에 많이 걸어서인지 오른쪽 뒷다리 당김은 한결 덜한데 비해 오랜 비행으로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약한 좌골에 무리가 오는 듯하다. 암튼 오래 앉아 있는게 쥐약이라니깐. 조제해 온 약을 먹었다.
그리고 약하게 고소 증세가 온다. 지난 여름 훈자 지역 이후 고소에 예민해진 탓일 게다. 해발 2,600 m 정도인 이곳에서 벌써 고소증이 오면 여행 후반의 쿠스코에서는? 아이구, 걱정되네.
물을 의도적으로 많이 먹으며 아침 시간을 정리한다.
“ 오늘도 새로운 날에 새로운 곳에서 가슴 떨릴 듯 기대되는 하루를 맞게 해 주신 주님, 감사합 니다. 주님, 오늘은 특별히 더 당신 가까이 있고 싶습니다. 당신 현존 안에서, 현존을 느끼고 저를 당신으로 채우고 싶습니다. 세계 3대 기적의 성당인 과달루페에서, 특별한 모습과 느낌으 로 당신을 만날 수 있을런지요? 순박한 후안 디에고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을 통해 당신 존재를 드러내셨듯이 오늘 제게 오십시오. 당신을 사랑하는 제 마음이 말로 표현이 잘 안 되고, 기도하 면서 온전히 당신께 몰입이 안 되는 어정쩡한 자세의 당신 자녀이오나 오늘 제 자신을 오롯이 당신께 내맡깁니다. 제 원의를 아시는 당신이니 저를 당신으로 채워주시고, 깨우쳐 주시고 변화 시켜 주시고, 그리하여 거듭나게 해 주십시오. 제게 오시듯이 사랑하는 저의 남편 신영씨도 오 늘의 체험이 당신과 영적으로 만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빠른 시일 안에 신영씨 를 당신 자녀로 불러주시길 기도합니다. 그가 진정 주님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로 살게 해 주십 시오. 그리하여 아름다운 공동체, 성가정의 가장으로 우뚝 서게 해 주십시오.”
오늘 아침 기도는 더 특별나고 새롭다. 오늘의 일정 때문이리라.
5시 무렵부터 디스코텍에서 나는 소음처럼 일정한 리듬에 맞춘 소음과도 같은 악기 소리가 요란하여 창밖을 내다보니 사거리 한 건물 앞에 사람들이 운집하여 깃발을 흔들고 있다. 아마도 시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로비로 내려오니 대도시에 온 실감이 난다. 호텔에 드나드는 사람들 숫자도 많고 왠지 부산한 모습들이다.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아침 식사를 입맛에 맛게, 정말 맛있게, 그러나 적당히 알맞게 먹었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식을 먹은 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은 정말 드문데 말이다.
산책 겸 시위 현장에도 가 보고 주변의 출근길 길거리 풍경도 감상하면서 어슬렁거렸다. 날씨는 최저 섭씨 9도, 아침 기온 12~13도라는데 적당히 산산하다. 호텔 앞에서 멕시코 전통 복장인 담요같은 천에 목만 구멍을 낸 판초를 사라고 익살스레 외치는 장수와 높은 의자 위에 손님을 앉히고 구두를 닦는 구두닦이를 상대로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바디 랭귀지여서 의사는 제대로 소통이 안 되었지만.
9시 10분쯤 버스로 출발하여 세계 문화유산 지정 지역인 센트로 히스토리코에 접어들었다. 소깔로 광장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반경 5Km 지역에 해당되는 센트로 지역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보호를 받을 정도로 이곳은 올메까, 테오티우아칸, 마야, 아즈테카 등 고대문명의 흔적들은 물론이고 스페인 식민 통치 문화까지 3천년의 역사가 도시 곳곳에 배어 있다.
멕시코시티는 인디오의 아즈테카 시대에는 호수에 떠있는 도시였으나 스페인이 식민지로 점령한 후 호수를 메워 분지의 형태가 되었다 한다. 이곳에는 아즈테카 도시의 건축물이 묻혀있다 하니 발굴되지 않은 거대한 도시 위에 오늘날의 멕시코시티가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곳 센트로 지역은 식민지 시대의 오래된 건물이 많이 있어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멕시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이곳 역시 그들의 역사 속의 한 장소인 만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버스는 우리를 소깔로 광장에 내려놓았다. 멕시코시티 중앙에 위치한 소깔로는 멕시코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소깔로’란 기반석이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 멕시코 어느 도시에나 있는 유럽식 광장을 이르는데 보통 주변에는 정부 주요청사 및 대성당과 교회로 둘러 싸여 있도록 설계되어 도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멕시코시티의 소깔로 광장은 중국 천안문 광장 다음의 어마어마한 크기로 유명하다. 사방 240m의 넓이로 1520년 꼬르떼스에 의해 만들어져 깊은 역사를 가진 곳이다.
광장은 주변의 파괴된 아즈테카 건물에서 가져온 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원래는 Plaza Real로 불렸으나 1843년 Santa Anna 대통령이 독립기념탑의 기반석을 놓으면서 이름을 소깔로(기반석)로 바꾸었다고 한다.
광장 중앙에는 멕시코 건국 신화가 담긴 커다란 멕시코 깃발이 펄럭이고 있고 1586년 인디오 출신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가톨릭 종교 개혁에 앞장 섰던 베니또 후아레스 대통령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이곳에서 매일 저녁 5시 30분 경에 위병과 음악대에 의해 국기 하강식이 엄숙히 거행되고 그 즈음부터 인디오들이 그들의 화려한 전통복장과 깃털을 꽂아 만든 모자를 쓰고 북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용맹스런 전사의 춤을 추고 여인들은 마야의 수예품과 벽화에서 본 것과 같은 모습으로 시민들과 관광객의 시선을 끄는 축제를 벌인다고 하는데 아침 시간이라 광장은 지난 밤의 열기가 피곤했던지 조용하다. 쓰레기 봉지만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소깔로 광장
소깔로 광장
소깔로 광장
소깔로 광장
소깔로 광장
광장을 중심으로 대로변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국립 궁전으로 갔다. 대통령궁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현재 오른쪽은 대통령 집무실, 왼쪽은 재무부가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멕시코 근대화의 아버지 베니또 후아레스의 기념실도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곳은 아즈테카 제국의 목테수마 2세의 궁전이 있던 자리로 지금의 국립궁전은 정복자 코르테스에 의해 세워졌다는 점이다. 1562년에는 스페인 총독의 거주지였으며, 1927년에는 재설계되어 3층이 추가되었다.
북쪽 끝에는 1872년 이 궁전에서 생을 마친 Benito Juarez 대통령을 기리는 동상과 박물관이 있고 중앙 입구에 있는 대통령의 발코니에는 1810년 9월 15일에 독립운동 선구자였던 Father Hidalgo에 의해 울려졌던 자유의 종을 볼 수 있다. 매년 9월 15일 밤에는 멕시코의 공식 행사로 가장 성대한 독립기념일의 축제가 열리는데 바로 이달고 신부의 도롤레스의 독립선언을 재현하여 국립궁전의 발코니에 대통령이 나타나서 “Viva Mexico! Viva la independencia!(멕시코 만세! 독립 만세!”)라고 외치고 이를 소깔로에 모인 수만 명의 민중이 제창을 한다고 한다.
1984년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여의도의 5․16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하에 수만 명의 군중들(주로 천주교 신자)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그 장소, 그 광장이 생각났다. 순교의 피를 흘린 신앙의 선조 103위를 성인 반열에 올리던 때였다. 뜻깊고 역사에 남을 행사들을 벌일 수 있는 그 광장을 왜 없앴는지 아쉽기만 하다.
궁전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이다. 이 벽화는 건물 2층 계단을 올라 중앙에서부터 긴 회랑의 벽에 아즈테카에서 스페인에게 나라를 빼앗겨 독립할 때까지 멕시코 역사의 전과정을 1929년부터 프레스코 벽화로 그렸는데 장대한 한 편의 서사시인 셈이다.
스페인에 살면서 피카소를 비롯한 큐비즘에 심취하면서도 그만의 미술 세계를 구축해 보였던 디에고는 1920년 당시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친구 호세 다스코세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참여하고자 귀국하여 많은 벽화들을 남긴 사회주의자이다. 수많은 여성 편력으로 그의 부인인 초현실주의 현대 미술가이자 역시 사회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의 삶을 더 고달프게 한 것으로 우리에겐 더 많이 알려졌을 그이지만 세계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멕시코 벽화에 가담하면서부터 정착된 그의 미술 세계를 구축하고 그로 인한 그의 위치를 인정받아 미국에서도 수없는 벽화 제작의 제의를 받았던 벽화의 거장이다.
오른쪽 벽부터 Vally of Mexico 시대의 화려함을 시작으로 테오티우아칸, 뚤라 등의 고대 도시의 이상적인 모습, 아즈테카의 평화로운 모습(옥수수 신, 또르띠야 만들기, 고무 채취, 금 채취,금은 세공, 마게이 식물 길쌈 등의 생활상), 멕시코 역사를 통해 거쳐온 혁명, 독립, 전쟁, 식민시대, 종교 등의 거의 대부분의 실제 역사를 담은 리베라 최고의 걸작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그림에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의 얼굴을 모델로 한 인물이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칼로의 얼굴을 찾으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꽤 괜찮았다.
한편 코너 벽면에 있던 ‘대가없이 세계로 전파하여 인류에게 공헌한 멕시코’라는 문구와 함께 열거한 이곳이 원산지인 작물들이 지금도 인상에 강하게 남는다. 옥수수, 콩, 담배, 카카오, 땅콩, 면(cotton), 토마토, 호박, 피스타치오, 감자, ……. 정말 많다. 그리고 놀랍다. 이곳이 사람들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토록 많은 작물들의 원산지라는 사실이. 때로는 피카소 풍도 보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 나라의 천경자 씨 작품같은 부분도 있고.
이 벽화를 못 볼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보고 보고 또 보고 하루 종일 벽화의 세부 내용을 짚어가며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이 나라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그림을 보며 역사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재미있고 효과있는 역사 공부가 될 것 같다.
국립궁전 - 중정
국립궁전 - 벽화
국립궁전 - 벽화
국립궁전 - 벽화
궁전을 나와 까떼드랄로 가는 길의 코너 쪽에 복원 공사가 한창인 곳이 있었다. 그곳이 'Templo Mayor'라고 한다. 이곳은 1978년 노동자들이 수도 공사를 위해 땅을 파다가 3m 가량의 큰 타원형의 조각상과 달의 여신의 조각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발굴이 이뤄졌다고 한다. 2차례의 발굴작업 끝에 현재 예전 사원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유적지가 도시 중심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색다른데 이곳은 실제로 아즈테카 문화 연구의 중요한 유적지로써 아즈테카에 의해 14~15세기에 걸쳐 세워졌으며 귀족과 전쟁의 신(Huitzilopochtli)과 비를 주관하는 신(Tlaloc)을 위한 성지 등이 있는데, 이는 가장 신성하고 불멸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뱀의 돌벽에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멕시코시티 도시 자체가 옛 아즈테카 문명을 아래에 깔고 형성되었다니 발굴을 위해 도시를 허물 수도 없고, 그대로 두자니 옛 문명의 터가 너무나 아쉽고, 고대문명 발굴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난감하고 답답한 그 속사정을 이 템플로 마요르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달래주는 아즈테카 유일의 유적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서 ‘Cathedral Metropolitana'로 이동했다. 이곳은 멕시코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 카톨릭의 대표적 건물로 1525년 착공되어 1813년에 완공될 때까지 무려 3세기에 걸쳐 완공된 주교좌 교구 성당이다. 고전 양식부터 바로크, 추리게라식,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고딕, 르네상스 건물 양식이 혼합되어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건축 양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가이드의 안내의 한계로 그 차이점을 비교해 보지 못하고 시간도 부족하여 그냥 휙 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점이 안타까왔다. 유럽의 건축 양식에 대해 한 자리에서 비교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러나 찬찬히 둘러보지 못하고 중앙 제대 옆 성모상 앞에 우리집과 지현이 가정을 위해 촛불 봉헌하고 정면 대형 성모상 앞에서,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있는 십자가가 유난히 눈길을 끌게 만드는 채플에서 짧지만 진심을 다하는 기도를 드리고 서둘러 나왔다.
성당 밖 보도에는 예전의 텍스코코 호수 위에 지었다는 증거로 바닥에 유리로 설치하여 바닥 건축물에 해당하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 놓았고 그래서 성당이 진흙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서 성당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성당이 다소 기울어져 보이기도 했다.
대주교 교구 성당
대주교 교구 성당
대주교 교구 성당
대주교 교구 성당
대주교 교구 성당
대주교 교구 성당
밖에 나왔을 때 6인조 길거리 악사인 마리아치(악보를 모르고 소리로 감을 익혀 연주를 한다고)를 만났을 때는 너무나 반가왔지만 광장의 열기가 살아나기에는 아직 오전이고 주변의 전통음식( 옥수수가루에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야자잎에 싸서 찐 것, 다시마 잘라서 조린 것 같은 용설란 잎을 익힌 것 등)을 파는 길거리 음식상들 주위에도 사람 그림자가 거의 없어 은근히 광장의 문화를 보고 싶었던 마음에 실망이 살며시 인다.
광장 가장자리로 죽 쳐진 천막들은 농성장으로 주로 쓰였었는데 요즘은 농성보다는 포장마차용 먹거리 판매, 관광객 상대의 기념품 가게로 더 많이 사용된다는데 그마저 썰렁하니 비어있다.
여행 떠나기 전부터 속상해 했던 국립 인류학 박물관을 포기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하필 오늘이 월요일이라니. 여행 일정 짤 때 적어도 멕시코시티에서의 일정에 월요일이 끼지 않도록 항공권을 조절했어야 했다. 새삼스레 강 차장이 원망스럽다. 좀더 치밀했더라면 이곳에서의 일정을 조금 늘려 내일 오전에 박물관 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도록 조절이 가능했을 텐데. 아들 동현이가 몇 년 전 유럽 배낭 여행을 할 때 바티칸 박물관이 휴관하는 바람에 관람할 수 없어 낙심 천만이었다는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박물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이곳은 꼭 보아야만 했다. 그 매혹적일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 안에 스페인 문화가 형성되기 이전의 수준높은 예술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을 뿐더러 장엄한 전시 스타일로도 정평이 나 있는 박물관이므로. 이곳은 박물관 설계의 개념으로 마야 문명의 유적지 욱스말 수도원의 이미지와 스페인식 소칼로 광장 풍을 빌어 박물관 중앙에 파티오 호수 정원을 도입하고, 박물관 앞에 있는 84m의 차양이 11m 길이인 단 하나의 기둥에 의존하고 있어 세계에서 단 하나의 기둥에 의해 세워진 가장 큰 콘크리트 구조물로 된, 과달루페 새 성당을 설계한 페드로 라미레즈 바스께즈의 1964년 작품이라고 했다.
1층은 멕시코의 고고학 유물들이 시대별로 구분되어져 있고, 2층에는 원주민의 민속학 박물관이 있는데 아름다운 작품들이 많아서 역사 박물관인 동시에 예술 박물관처럼 느껴지는 곳이라고도 한다. 또 대부분의 박물관의 자료들은 테라스를 향해 오픈되어 있고 인공 호수 주변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휴식을 누릴 수 있도록 자연과 조화되는 공간 활용을 하여 방문객의 편안함을 우선으로 하는 배치 방법으로 세계 제일의 박물관이라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해 봐도 어쩔 수 없다. 더구나 관광 기념품 판매의 절반을 차지하는 일명 아즈테카의 달력이라는 태양의 돌의 진품이 그곳에 있지 않은가! 아즈테카 왕조 6대왕 아샤야까뜰이 1479년에 만들어 신에게 바쳤다는 직경 3.5m, 무게 2.5톤, 두께 90cm인 현무암의 그 원반이 말이다. 그 아쉬움을 보상시켜 주려는 듯 가이드는 바쁜 일정을 조정하여 예정에 없던 ‘삼 문화 광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삼 문화 광장은 아즈텍 2번째 신전 건축물과 스페인 정복 초기의 성당과 흰색의 현대 건축인 외무부 건물이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어 3개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지역에 붙여진 이름이다.
광장에는 멕시코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피흘림의 역사가 새겨진 비문이 있었다. 성당은 아즈테카 신전이 파괴되면서 그 돌을 이용하여 지은 식민 문화의 대표격 건물이라면 성당 앞 광장에서 아즈테카가 스페인과 대항해 싸우다 패배했고 그리하여 1531년 8월 13일 아즈테카 최후를 맞이한 장소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소에 세워진 간판에는 스페인에 대한 적개심보다는‘최초로 메스티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으로 그들 역사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내용이 적혀 있어 오늘날의 멕시코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 안 되는 자세에 이해를 돕는 구절이기도 하다. 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미국보다 훨씬 없다는 것도 이런 역사 수용, 인정의 태도 때문이리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당시 10월 2일에 반정부 집회가 열렸던 10월 항쟁으로 2,000여 명의 피가 여기에 보태어졌다. 그러나 71년간의 일당 독재 동안 그 사실을 진실되게 기록한 곳이 전혀 없이 비밀에 붙여졌고 진실이 기록된 유일한 곳이 이 광장에 세워진 비석이란다. 오랜 독재하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피흘린 생명들이 너무나 많은 우리 나라의 역사와 겹쳐지면서 비감한 마음이 들었다.
삼 문화광장
삼 문화광장
삼 문화광장
삼 문화광장
발걸음을 재촉하여 북쪽에 있는 쎄로 델 테뻬악 언덕에 있는 과달루페 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멕시코의 국가적인 상징인 검은 머리,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과달루페 성모님이 모셔져 있는, 교황청이 공인한 가톨릭 3대 기적의 성당 중 하나이다.
스페인이 아즈테카를 점령한지 10년 후인 1531년 12월 9일 신앙심이 강한 이곳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금으로 장식한 푸른 외투를 입은 갈색 피부의 동정녀 마리아가 나타났다. 마리아의 발현 사실을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믿어주지 않아 답답해 하는 후안을 위해 마리아는 장미꽃다발을 주었다. 황송한 마음에 자신의 망토로 그것을 받았는데 그 옷에 빛나는 마리아 상이 찍혔다.
이후 이 사건은 기적으로 인정받았고 그 이후에도 성모님은 4번 더 발현하였다고 한다. 그 기적을 기리기 위해 1533년 그 자리에 성당을 지었는데 쌍둥이 타워를 양옆으로 놓고 있는 바로크식 퍼사드로 성모님의 모습을 부조로 새겨 놓았다.
광장에는 이곳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이 우뚝 서 있고 기울어져 가는 성당은 보수 공사를 위한 철골조들이 얽혀 있는데 출입구 정면에 대형 과달루페 성모님의 상이 걸려 있고 입구 안쪽에 후안 디에고의 상이 대리석인가, 브론즈인가로 제작되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옷자락엔 장미꽃과 더불어 성모님의 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곳은 수세기 동안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을 하였으며 현재는 붕괴의 위험이 있어 1976년 새로 성당을 지어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완공된 새 성당에는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진 망토를 공개하여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요일 미사에는 신앙심이 깊은 멕시코의 가난한 인디오 계층이 많이 참석하여 매우 혼잡하고 12월 12일 과달루페 성모일이 되면 신자들이 장미꽃을 들고 문에서부터 제단까지 무릅으로 기어가면서 특별한 기도를 드리는 열성을 보인다고 하며 하루종일 수십만 명의 순례자가 봉헌한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시점에서는 여러 나라의 성지 순례객 단체들이 이곳 저곳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나 슬행 기도를 드리는 순례객은 보이지 않았다.
새로 지은 성당은 인류학 박물관을 설계한 베드로 라미레즈 바즈께즈의 작품이라는데 2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는 대형 실내 경기장 같은 원형 건물에 인디오 모자(솜부레)를 위에 씌운 형상으로 정면에 십자가가 이중 돌 조각으로 멋들어지게 얹혀졌고 그 아래 성모님의 발현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나는 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네 엄마이다. 너를 사랑하는 네 엄마이다.”
건물 상단으로 돌아가면서 돌출 스테인드 글라스가 운치있게 자리잡고 있어 단조로움을 피했으며 출입문은 운동장 출입문처럼 돌아가면서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다. 원형이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았고 들어갔을 때에는 미사가 진행중이었다. 나도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를 하고 싶었지만 단체로 함께 온 일행들의 오후 스케줄 때문에 길게 지체할 수 없어서 마음만 참석하였다.
지하에 자동 벨트가 설치되어 참배하기 좋게 설치해 놓은 곳의 벽면에 그 유명한 기적의 성모님 모습이 걸려 있었다. 성모님의 말씀과 함께. 성모님의 음성을 듣듯이 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기꺼이 ‘예’로써 동참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셨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언제나 주님께 기도드리시는 어머니. 그 넓고 자애로운 품으로 우리를, 부족한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시고 위로해 주시며 격려하고 용기를 주시는 엄마. 엄마.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엄마라는 사실이, 그 사랑이 이렇듯 감동적일 수 없고, 이처럼 든든할 수가 없다. 복잡한 사람들 사이에서 벨트를 3번이나 타면서 보고, 또 바라보았다.
성물 판매소에서 일행들이 선물을 고르는 동안 성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미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영성체 하는 대열에 낄 수가 없다. 잠시 묵상을 한 후 다시 일행들 곁으로 돌아왔다.
새 성당 정면 쪽의 광장에는 대형 퍼사드가 세워져 있고 양면에는 마야의 달력인 태양의 돌의 시계가 그려져 있는데, 구조물 가운데로 종을 여러 개 매달아 종탑으로 사용되는 것이 마야의 인신공희의 악습이 횡행하는 어리석은 땅 위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인류 사랑의 메시지가 바르게 자리잡아 뿌리내린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보이는 곳이라는 상징이 그 종탑에 담겨 있는 듯했다. 새 성당과 광장의 종탑은 건축학적으로도 유명하여 건축학도들도 견학을 하여야 할 곳이라고 한다.
후안의 생가였던 자리에 세워진 인디오를 위한 성당, 떼뻬악 언덕 성모님의 발현 장소에 세워진 빛나는 과달루페 성모님 조각상 주변으로 아름답게 가꾼 장미 동산을 한 바퀴 돌아 아쉬움을 남기고 버스를 탔다. 언덕 아래 시가지는 한참을 가도록 성물을 파는 선물 가게들이 줄을 이어 있었다.
과달루페 사원 - 신성당
과달루페 사원 - 신성당
과달루페 사원 - 신성당. 성모 마리아
과달루페 사원
콰달루페 사원
콰달루페 사원
우리 일행은 더 많은 관람시간을 갖기 위해 식당에서의 저녁 식사를 반납하고 대신 테오티우아칸에서의 시간을 좀 더 여유있게 갖기로 했다.
태양빛은 적당히 따갑고 바람이 상쾌하다.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 케찰코아틀 신전이 있는 테오티우아칸으로 향했다.
멕시코시티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현재 실상을 짐작하게 해 주는 흔히 말해 달동네라고 하는 산동네 판자촌 마을인 에스타델 메이꼬 지역을 지났다. 1200만 명의 멕시코시티 인구의 출퇴근 시간대의 러시 아워의 원인이 되는 이들 서민층의 대부분들이 거주하는 공간. 멕시코시티에서 거주하려면 최소한 수입이 100만원 이상이어야 하는데 멕시코시티와 연결되어 출퇴근하며 살아야 하면서도 일반적인 40~50만원 대의 봉급에 25만원 이하의 최저 생계비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의 터. 경제적 이유로 주거 공간을 외곽으로, 외곽으로 옮기다보니 이처럼 대형 판자촌이 형성될 수밖에.
외곽으로 밀려나 삼양동, 성북동, 금호동, 봉천동에 산동네, 달동네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성북동 비둘기’가 되어 대도시에 진입 못하는 소시민의 애환을 노래해야만 했던 우리의 1970년대 서울의 모습이 저 산자락에 펼쳐져 있다.
현재 대통령으로 당선된 펠리페 깔도나야를 부정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면서 그를 인정 안 하고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자신을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면서 별도의 취임식까지 치렀다는 진보당의 로페로 오브라도가(전 시장 출신이고 추진력이 대단한 사람) 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 역을 수행하고 있어 2명의 대통령을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칼한 국가라니 저들의 삶의 질이 조금은 나아질까? 그럴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테오티우아칸으로 가는 길에 점심 식사를 했는데, 현지 멕시코 전통 뷔페 식당 ‘멕시코 린도’ 앞에서 선인장(용설란)의 일종인 마게이(6~7년생)에서 뿔케(칼로 잘라버린 밑둥에 고인 물을 1일간 발효,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한 서민용 술로 수면제 성분이 있어 졸음 유발한다고.) 만드는 법, 잎에서 섬유를 뽑아내어 튼튼한 밧줄을 만들고, 종이를 만들어 의식용으로 사용하는 법, 데낄라(마게이 잎을 잘라내고 포기만을 뽑아 발효시켜 증류한 술. 40~60도 정도의 독한 술이나 냄새가 없고 산뜻한 맛이 특징. 여과후 바로 마시는 떼낄라 블랑꼬, 1년 미만의 숙성을 거친 떼낄라 레뽀사다 노란색, 1년 이상의 숙성을 거친 떼낄라 아네호 노란색 3종류 있음) 마시는 법 등을 능수능란한 언변(영어, 한국어, 스페인어 섞어서)으로 익살스럽게 하고 있어서 구경했다. 주변에서 많이 재배하는 식물을 저처럼 지혜롭게 이용하는 이들의 과학성, 실용성이 놀랍고, 설명이 너무 재미있어 빠져드는 동안 어느 새 상점 안으로 유인한다. 정말 자연스럽게 세련된 호객 행위이다.
가슴 답답한 고소 증상이 해결이 안 되고 담배 연기에는 거의 숨을 못 쉴 정도로 가빠온다. 입술도 부르텄다. 아직은 여행 일정 전반인데 벌써 이렇게 난조 현상이 보이면 곤란한데. 걱정이 점점 커 온다.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시티에서 불과 1시간 거리(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기원전 2세기경 건조된 신대륙 최대의 도시국가이며 기원후 7세기까지 번영을 누렸고 도시 면적 20만 평방킬로미터, 2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고대도시로서, 당시 유럽(로마제국)에서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제외하고는 인구 2만이 넘는 도시가 없었다고 하는 거대한 유적지이다.
어느 순간 왜 멸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 길 없으나, 인구 과잉에 따른 식량부족이나 전염병, 기근 등의 천재 지변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만 돌 뿐이다.
평화로운 신제정치는 모든 정사를 관장하는 신관을 정점으로 군인, 상인의 계급으로 나누어져 최하층의 직인들도 직종별로 각각의 지역에서 정연히 생활하였다. 신관은 꾸준하게 피라미드의 건설을 지휘하였고, 종교제사를 정확히 집행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수학, 천문학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다단계로 쌓아 올린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기자 쿠프왕 피라미드보다 작지만 큰 침묵의 주름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경사진 기반 위에 수직으로 판면을 끼워 넣은 기단이 중첩되어 거대한 피라미드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 말끔히 복원되었으나, 처음에는 타르 타블레로 건축양식으로 건설된 피라미드의 석면(石面) 위에 회반죽을 덮고, 안료를 사용한 벽화가 있었다니 그 화려함과 위엄으로 태양의 신전은 더욱 신령스러웠으리라. 북측으로는 달의 피라미드가 죽음의 거리를 막아 서 있는 듯 도시의 맨 위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보다 멀리 남측으로는 케찰코아틀 피라미드가 내리쬐는 태양열에 달구어진 공기의 일렁임 속으로 아득히 멀게만 보인다.
여기는 인간의 도시라기보다 신들의 고향이다. 태양과 달의 신 그리고 새벽별의 신이 마주앉아 신들의 대화를 나누는 곳이다.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신들을 위한 건조물로 가득차 있는 신들의 도시다. 후에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어진 분지의 한복판에 방치된 테오티우아칸을 찾아온 아즈테카인들은 장엄한 피라미드를 보고 이것이야말로 신들이 만든 도시라고 믿고 자신들의 우주관인 ‘태양과 달의 신화’의 무대로 삼았다. 현재의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이란 명칭도 아즈테카 신화가 투영된 것이다.
나우아틀 신화에는 ‘테오티우아칸은 신들이 태양과 달을 창조하기 위해 모인 장소였다. 성스런 땅 위에 두 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그 정상에서 두 명의 신, 나나우아친과 텍시스테카틀이 성스런 불꽃으로 뛰어들어 각각 태양과 달로 환생하였다.’고 전한다. 아즈테카인은 멕시코시티에 테노치틀란 수도를 세우고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이곳을 나우아틀어로 ‘신들이 변화하는 장소’라는 뜻을 지닌 ‘테오티우아칸’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들은 도로 양쪽 건물 터를 왕의 분묘라고 생각해서 이곳은 아즈테카 왕들이 그들의 사후 신으로 변화되는 분묘의 땅이라고 믿었다. 또한 길에서 많은 유골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우주를 재생시키고 태양의 일상적인 운행을 도와 세계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한 그들의 인신 공양의 제물들이 신전으로 걸어갔던 길이었으리라고 추측하여 ‘사자(死者)의 길’이라고 불렀다.
태양의 피라미드
전면에 248개의 계단이 있고 이 계단을 오르면 정상에 이르는데 계단 옆 경사면의 돌과 돌 사이에 돌의 흘러내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위로 세운 돌들이 계단을 피해 경사면으로 오를 경우 손잡이 역할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한 고소증에다가 뜨거운 햇살이라는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올라가 보니, 정상은 평탄하고 넓이도 넓었다. 이 피라미드 위에서 종교의식이 행해졌으리라고 여겨졌다.
경사각도가 43.5도이라니 오르기도 만만치 않았지만 정상에 올랐을 때는 도시 전경이 모두 내려다 보일 뿐만 아니라 바람까지 시원하여 일순간에 흐른 땀이 모두 씻기는 기분이었다. 멀리 사자의 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비슷한 높이로 우뚝 서 있는 달의 피라미드(달의 피라미드가 서 있는 곳보다 이곳이 낮은 지대여서 비슷한 높이로 보이나 실제는 이 피라미드가 훨씬 높이가 높고 규모가 크다.)가 잘 보이는 난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바람결에 영고의 세월의 냄새가 묻어오는 듯하다. 이런 유적지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세월의 무상함이 주는 쓸쓸함이 밀려온다. 영원한 삶을 지향하고 무한한 신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모하리만큼 쏟아부은 인간의 노력, 그 피땀들이 다 무엇이더란 말인가. 그들은 결국 이곳에 없고, 그곳을 찾은 우리 역시 우리 체취를 바람 자락에 날리면서 언젠가는 스러지고 마는 것을.
“죽은 자의 길(그리고 그 연장선상)의 주위에 서 있는 주요 건축물 사이에 복잡한 수학적 연관이 있다. 이 수학적 연관은 의외의 것을 표현하고 있다. 테오티우아칸의 유적은 태양계를 정확하게 축소한 것인 듯하다. 케찰코아틀 신전의 중심을 태양이라고 하면 죽은 자의 길을 따라 서 있는 건축물들은 정확히 행성과 소행성의 궤도 위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목성,토성(태양의 피라미드에 해당), 천왕성(달의 피라미드에 해당), 해왕성, 명왕성(아직 발굴되지 않았지만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 등의 위치를 가리킨다.”
태양의 피라미드
이런 이론들에 근거하여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통해서도 지구의 북반구를 축소해서 나타내려고 했다는 가설을 펴며 테오티우아칸 뿐만 아니라 고대 왕들의 무덤으로 정설화된 이집트의 피라미드 연구에 새로운 방향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의 구절이 생각난다. 1만 1500년 경 이전에 지구에는 고도의 문명을 지닌 인류가 있었고 그들은 어떤 연유로 멸망(신화에 근거해 지진, 대홍수 등의 천재지변)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이 배를 타고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대륙에 그들이 아는 문명을 전파했다는 그의 가설이 그럴듯해 수긍이 갔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에게 많은 자료집에서처럼 마야나 아즈테카와 같은 인신공양의 제사 풍습이 이곳에서도 있었냐는 나의 질문에 그건 이곳을 발견한 아즈테카인들이 그들의 문명에 근거한 추측일 뿐 실제적으로 인신공양을 했다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으며, 지금 우리가 한가하게 걷고 있는 이곳 사자의 길도 이름과는 무관하게 은하수를 의미하는 물을 채웠던 대수로였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 ‘달의 피라미드’를 향해 가는 이 길은 ‘올라간다’는 표현에 맞게 약간의 경사를 이루며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고, 중간 쯤까지는 다단계 호수처럼 큰 길을 구획으로 나눠 담장까지 쌓았다. 마치 농지 정리를 마친 계단식 논처럼 달의 피라미드가 있는 북쪽 상부에서부터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 아래로 향해 흐르던 물이 가장 위쪽에 위치한 사각 마당을 가득 채우고 넘치면 바로 아래 다른 마당으로 흘러내리는 연속적인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곳에 물을 가득 채우고, 이 호수에서 이는 작은 물결파도 놓치지 않고, 무서운 재앙인 화산 폭발이나 지진을 예측하는데 이용하였다.’는 어느 학자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고대 문명을 과학적으로 접근해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이 그럴싸하게 생각되었다.
태양의 피라미드
태양의 피라미드에서 본 사자의 길
태양의 피라미드
사자의 길
8~10 차선쯤 되는 대로를 천천히 30분 이상 걸어 올라간 끝에 커다란 달의 광장과 맞닥뜨렸다. 그 광장은 4개의 계단식 각뿔에 둘러싸여 있으며 각 기단의 중앙에는 신전이 있다. 또한 광장 중앙에는 측면이 장식된 사각형 제단이 있다. 그 중에서도 북쪽 정면에 높이 솟아있는 ‘달의 피라미드’는 압권이다. 이 피라미드가 사자의 길 정면에 있는 걸 보면 해마다 200~300일 정도나 되었다는 화려한 축제가 종교의식과 더불어 이 광장에서 행해졌고 그때 이 피라미드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장소라고 여겨진다.
‘태양의 피라미드보다는 낮지만 보다 높은 대지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둘의 높이는 같다.’는 수리학적 증명으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진 건축물이라는데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프 왕의 피라미드가 대피라미드보다 실제로 더 낮은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두 피라미드의 정상의 높이는 같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이 두 문명간의 관련설은 당연히 추측 가능하고 그런 관점에서 나온 학자들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다시금 검증해 보아야 할 우리의 숙제라고 여겨진다.
4층 구조의 달의 피라미드 정상을 향해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급하게 조성된 경사면을 따라 힘들게 올라갔다. 정상은 크고 작은 돌들을 무질서하게 박아 놓아 걷기가 힘들다. 공원의 운동 기구들을 설치한 곳에 발지압을 위해 박아 놓은 돌들과 흡사하다. 발바닥에 지압이 가해지는 부위에 따라 심장, 폐, 간, 위 등의 장기의 기능이 활성화될 수 있다는 지압 이론을 떠올리며 신발을 벗고 돌위를 걸으려 해 보았지만 올라오느라 지쳐서인지 위로 솟은 굵직한 돌들이 발바닥에 가하는 힘이 너무 커서인지 걸을 수가 없어 뒤로 벌렁 누웠다. 등허리 부위에 적절히 지압이 가해지며 온몸이 시원해진다.
푸른 하늘에 무심히 떠 가는 구름빛과 함께 강렬한 태양빛이 얼굴로 쏟아져 눈을 감았다. 온몸이 두둥실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태고 시대로 훌쩍 날아가고 있다는 공상을 해 본다. 고대 문명의 진상을 밝혀 보고 그들의 진실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 존재한다는 것, 생명을 지닌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이처럼 대단한 일이고 자신들의 존재 흔적을, 소망의 간절함을 나타내려고 이처럼 장대한 문명을 남기는 인간의 능력의 크기를 가늠해 보면서 난 역설적이게도 점점 오그라들어 한 개 점으로 변해 버리는 듯 아득해진다.
귓가로 아스라하게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릴 즈음 일어나 앉아 ‘죽은 자의 길’을 내려다 보았다. 직선으로 쭉 뻗은 사자의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점처럼 작게 보인다.
왕이 앞장서고, 그 뒤에 제사장, 군인, 또 포로로 잡혀 온 제물들의 기다란 행렬이 그려진다. 아니, 아니다. 물이 가득 채워진 기나긴 수로에 물결이 일렁이고 이어 물보라가 칠 정도로 물살이 빨라지고 이러한 이변을 왕에게 알리느라 급해진 관측자들, 대피령을 내리는 장교들, 그들의 성급한 발걸음과 고함 소리가 들린다.
검은 빛을 띠고 있는 완벽하게 정비된 전설 속의 거대한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이런 저런 상념에 젖은 채 오랫동안 편안한 자세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달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에서 본 전경
달의 피라미드
한 변의 길이가 무려 400m, 높이 7m나 되는 담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광장이 죽은 자의 거리 남쪽 끝을 막아서고 그 안에 망루같이 우뚝 서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 아즈테카인들조차 이 건축물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는 피라미드의 내부에 있는 케찰코아틀 신전. 정사각형 4단으로 축조된 이 신전은 테오티우아칸 중에서 장식미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데 부조와 벽화의 내용으로 보아 이 시대는 농경 사회로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태양신에 대한 제천행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중앙 제단에서 행해지는 제사장의 제천의식을 4단의 4곳 벽면 쪽에서 부제사장 16명이 그대로 재현하여 보여 주었다고 한다.
이 신전에는 무수한 테오티우아칸 신들이 판각되어 있고 이마에 두 개의 고리와 커다란 어금니를 지닌 형상을 취하고 있는 톨라록(연구가들이 시에서 가장 중요하고 공통적인 신이라고 간주함)과 꽃잎이 새겨진 뱀의 머리가 피라미드 서쪽 난간에 부조되어 있어 신전 이름도 케찰코아틀이라고 했다는데 아즈테카족의 종교와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테오티우아칸의 경우도 깃털의 뱀은 대지와 물을 상징하고 톨라록은 비를 상징하고 있기에 이곳에서 패각, 소라가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달의 광장 서측에는 케찰코아틀 궁전, 재규어 궁전, 깃털의 소라로 불리는 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중요한 지하 건축물이 있는데 실질적인 지배자이거나 도시 최고의 신관이 이곳에서 기거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이처럼 장식적인 아름다움과 테오티우아칸의 실제적 삶의 흔적을 접할 수 있는 케찰코아틀 신전과 궁전의 지하 건축물을 둘러보지 못한 것은 이번 여행 최대의 실수이자 실패라고 보겠다. 아무리 정해진 시간 일정상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해도 용서가 안 되는 일이다. 조금 서둘러서 그곳들도 둘러볼 시간을 낼 수 있었고 꼭 보았어야만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의 여유 시간을 갖기 위해 저녁 식사까지 반납하지 않았던가? 두 피라미드 모두를 욕심껏 오르는 무리한 일정 때문에 여행 전에 테오티우아칸에 대해 공부했던 내용을 순간적으로 잊었다고 하더라도(짐을 줄이려고 자료와 약도를 안 가지고 버스에서 내린 게 결정적인 실수) 가이드가 이걸 짚어주었어야 했다.
여행을 끝내고 여행기를 쓰며 여행 지역을 자료와 더불어 다시 돌아보는 지금 테오티우아칸에 있었으면서도 그 두 지역을 놓친 것이 이처럼 부끄러울 수가 없다. 그리고 시간상 관람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더라도 적어도 언급과 더불어 여행자에게 양해 정도는 얻어야 했을 현지 가이드(여행사 사장이라고 좋아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좋아할 일이 아니었음.) 진규환 사장이 이처럼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여행자의 방심과 무지가 빚어낸 실수와 가이드의 시간 벌기 위한 간교한 작전의 이중주가 남긴 회한이 너무 커서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과달라하라, 팔렌케, 몬테알반, 욱스말 등의 유네스코가 정한 들르지 못한 문화 유산뿐만 아니라 휴관으로 놓쳐 버린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학박물관과 이곳 테오티우아칸을 다시 제대로 보기 위해서도 멕시코는 다시 와야 할 곳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 같다.
5시에 테오티우아칸을 떠나 공항을 향해 출발하여 생각보다 체증이 없는 도로를 날 듯이 달려 6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여행지인 브라질로 가기 위해 란 칠레 항공을 이용해 산티아고를 경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짐 부치고 따끈따끈한 맥도날드 햄버거와 콜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먹어 본 햄버거여서인지 무척 맛있었다. 위에 언급한 지역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놓쳤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도 햄버거가 그처럼 맛이 있었을까? 과연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는 우리 속담이 맞는 것일까? 출국 절차를 밟고서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1시간 이상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오는 지금 더더욱 속상해진다.
9시발 LA 621 가 한 시간쯤 지연되어 밤 10 시경에 이륙하였다. 세수도 마친 터라 느긋하게 피곤한 몸을 의자에 부리고 잠을 청했다.
오늘의 일정 : - 아즈텍의 도시, 멕시코시티 유적지 (소깔로 광장, 대통령궁, 템플로
마요르, 대성당, 삼문화 광장, 과달루페 성당) 답사
- 전통 멕시코 현지식 점심 식사 후 테오티우아칸 답사(태양의 피라미
드, 사자의 거리, 달의 피라미드)
- 공항으로 이동. 칠레 산티아고행 LA 621 편으로 22시 이륙.
※ 멕시코와 멕시코시티 :
중남미 제일의 대도시인 멕시코시티는 25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어 인구밀도 면에서 1위인 도쿄 다음인 세계에서 두 번째인 도시이다. 위치는 해발 2,600m의 계곡에 있으며 정부 소재지인 수도로 상업, 금융, 예술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테오티우아칸 문화부터 아즈테카 문명, 스페인 지배 초기의 문명까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흔적은 각 거리에 세워진 근대적인 건물과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의 조화에서 볼 수 있는데, 유적지와 고풍스런 건물들과 한편으로는 인디오 문명의 폐허 위에 유럽식의 호화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등 고대, 근대, 현대의 모든 요소가 집결되어 있다. 멕시코시티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때는 1535년으로 멕시코시티가 코스타리카까지 영토를 통치하는 누에바에스빠냐 부왕청의 수도가 되어 안토니오 드 메데사가 초대부왕으로 부임한 때이다. 그는 멕시코시티를 바로크식 건물, 넓은 공원, 잘 계획된 도로 등 아름다운 도시로 개발시켰고, 이후 정리가 잘된 도시인 만큼 식민지 경영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멕시코는 18 세기에 이르러 새로 스페인 왕좌를 차지하였던 부르봉 왕조가 멕시코의 부분적인 자치권을 빼앗고, 왕권을 집중시키고 정규군을 창설하고 세금을 더 많이 부과하는 등 과도한 착취를 일삼기 시작하자 멕시코의 끄레올레들과 스페인 관리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776년 미국 독립혁명, 1808년 나폴레옹 부르봉 왕조의 전복에 힘입은 멕시코는 1810년 9월 16일 교구 사제인 미겔 이달고의 독립을 위해서 무장봉기 하자는 외침과 함께 첫 번째 반란이 일어났으며 4년 후에는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이끄는 반란에 이어 1821년 군대가 스페인에게 정권을 장악한 후에 멕시코 끄레올레 엘리트에 의해서 독립이 선언되었다. 당시의 수도는 베라크루스로 변경되었다가 1860년에 다시 멕시코시티로 옮겨졌다. 이런 멕시코의 역사의 흔적은 멕시코시티에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특히 기독교적인 웅장한 건물들은 멕시코시티의 역사에 기인하는 것으로 과거 스페인의 신대륙 침략자들에 의해서 강제로 기독교가 전파되었는데 오히려 이것이 지역 주민들의 예술적인 기술과 혼합되어 웅장한 건축물을 완성시켜 종교적인 의미와 함께 예술적인 업적으로 남아 있다.
현재 멕시코는 전형적인 1차 산업국가로 설탕, 커피, 석유, 동 등의 주요 산물이 있으며 점차적으로 자동차와 다른 경공업제품도 생산하고 있다.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에 힘입어 경제적 성과를 거두는 듯했으나 무리한 경제 정책으로 엄청난 경제난으로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고,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체계가 잘 정착되지 못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의 제도를 혼합한 방식의 연방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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