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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터마을 하우현성당 - 광교산 손골성지 도보순례 본문
원터마을 하우현성당 - 광교산 손골성지 도보순례
오늘의 도보일정은 하우현성당에서 손골성지까지이다. 인덕원역에서 버스로 원터마을에 위치한 하우현성당으로 향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원터마을 입구의 감나무는 잎이 떨어지고 주렁주렁 달려있는 감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있다.
원터마을의 감나무
하우현성당
청계산(淸溪山)과 광교산맥(光敎山脈)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km, 안양에서 16km 떨어진
곳으로 높은 산과 자연의 계곡, 거기에 울창한 수림은 박해를 피해 안식처를 찾는 교우들에게는 다행한 곳이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험준한 이 산골에는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신유년(辛酉年), 병오년(丙午年) 박해 때부터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의일(義一, 지금의 鶴日里) 마을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광주 포교에 잡혀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일이 있고, 그 뒤 하우현 마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이 1845년 9월 역시 광주 포교에게 잡혀가
그해 12월 남한산성에서 치명되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가 묘론리(卯論里)에서
조선말을 배우다가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우현 성당은 의왕 자연8경으로 선정되어있고, 경기도 지정문화재이다.
하우현 성당
사제관은 105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건축물이다. 19세기 초반부터 천주교인의 피난처로서 교우촌이 형성되어 1884년에 공소
공동체를 갖추었다. 1894년 초가 10칸 규모의 목조 강당으로 지어 공소의 강당을 사용하였고,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종(鐘)을
기증하였다. 1900년 본당으로 분리 독립하여 사플랭신부가 부임하여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1954년 안양읍내에 성당을 신축하여
본당으로 승격하였으며, 1965년에 현재의 성당으로 신축되었다. 사제관은 몸체는 석조로 구성하고 지붕은 골기와 팔작집으로
이루어진 한불 절충식 건물이다. 사제관이 앞뜰에는 선교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866년 순교한 블리외신부 기념비와 김영근신부의
기념비도 있다.
사제관
원터마을을 나와 도로를 건너고 외각순환도로 통로box를 지나면 바리산, 백운산 등산로입구로 들어선다.
바라산 등산로입구
구름에 가려진 백운산
초겨울에 꽃을 피운 때이른 진달래
낙옆 깔린 능선길
능선길을 내려와 운중동 도로를 걸어 백헌 이경석 선생의 유적지로 갑니다.
이경석 선생묘
白軒(백헌) 이경석
이경석(1595∼1671)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全州(전주) . 자는 尙輔(상보) . 호는 雙磎(쌍계) . 후에 白軒(백헌) 이라 하였다.
父(부)는 惟侃(유간) 으로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이며 사후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母(모)는
開城高氏(개성고씨) 대호군 漢良(한량) 의 딸로 정국공신 開城君 守謙(개성군 수겸) 의 증손이다.
1613년(광해군 5) 進士試(진사시) 에 합격하고 1617년 증광별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에 廢母論(폐모론) 의 상소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削籍(삭적) 당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謁聖文科(알성문과) 에
乙科(을과) 로 급제하여 承文院(승문원) 에 등용되었다.
李适(이괄) 의 亂(난) 때에는 승문원제조로 인조를 公州(공주)로 호종하여 조정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33세인 1627년(인조 5)에
丁卯胡亂(정묘호란) 때에는 체찰사 장면의 從事官(종사관)이 되어 강원도 군사모집과 군량미조달에 힘썼다. 이때에 쓴
‘檄江原道士夫父老書(격강원도사부부로서) ’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
1636년 丙子胡亂時(병자호란시) 대사헌 부제학에 연배되어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이듬해 三田渡碑(大淸皇帝功德碑)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의 碑文(비문) 을 撰(찬) 하였다. 이 비문을 완성한 후에 공은 그의 형에게 문자 배운 것을 한탄하였다
한다. 소재지 : 분당구 석운동 산16-18
이경석 선생 묘지석
붉게물든 단풍
이종무로의 단풍나무
고기리 전원마을
이종무로라는 도로는 있고 이정표는 제대로 표시 되어 있지 않아 찾아가기 어렵웠고,
입구도 사유지를 통과한 뒤편에 안내표지판이 있었다.
관리가 않되고 있는 묘역
이종무 장군 묘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1360-1425)의 묘이다. 이종무는 장수(長水) 이씨로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고 고려 우왕 7년(1381)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태조 6년(1397) 옹진만호로 있을 때 서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첨절 제사에 올랐다. 정종 2년(1400)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간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 4등에 올랐고 통원군에 봉해졌다. 그후 세종 원년(1419) 삼군도 채찰사가 되어
군졸 1만 7천여명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고 도망한 대마도 도주 소오사다모리를 일본 본토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고 돌아와 의정부 찬성사가 되었다. 세종 3년(1421) 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종무의 묘는
북동쪽을 향하고 있고 바로 앞에 묘비와 상석이 있다. 좌우로는 무덤을 수호하기 위하여 세우는 2개의 문신석이 서 있다. 처음에는
건립되었다는 신도비와 재실은 현존하지 않는다.
묘역 입구 돌계단
동천동 주택가 끝에 골짜기에 위치한 손골성지
손골성지
수원시 북쪽에 솟아 있는 광교산 동쪽 깊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손골 성지는 옛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했던 곳으로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곡(蓀谷)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으로 병인박해(1866) 때에는 10여호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신자들의 부락 '성교촌'이라 불리어 오는데 특히 이요한,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가
손골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시 피신하여 신미년(1871년 3월 16일)에 순교하였다 한다(치명일기).
손골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로서 특별히 성 도리 헨리꼬 신부님께서 조선에 입국하여(1865)
선교하시다가 포졸들에게 직접 체포되신(1866) 곳이다. 이곳은 1857년 페롱 신부,1861년 조안노 칼레 신부, 1863년 오 오매트로 신부
등이 입국하여 활동하던 곳이고, 조선 제4대 교구장인 장 베르뇌 시므온 주교도 방문(1861, 1863)했던 곳으로 신앙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성지이다.
손골성지
성 김(도리.Dorie)헨리코 신부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탈몽에서 태어나 교구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다니다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64년 5월 21일 사제가
되었다. 조선선교사가 되어 1865년 5월 27일 충남 내포지방에 도착하였고 6월 23일부터 베르뇌주교의 지시에 따라 손골에 머물며
우리나라 말과 풍숩울 익혔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자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홀로 손골에 남아 기도하다가 2월 27일 손골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후 3월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 순교비와 성당
성당
성 도리 신부 헌양비
순교비의 맨 꼭대기에는 프랑스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는 농부였던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맷돌로 만든
것이다.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고향 본당에서는 그 맷돌로 똑같이 생긴 십자가를 두 개 만들어 하나는 도리 신부
생가에 두고 다른 하나는 한국으로 보냈다. 1966년 10월 24일 축복되었고 이때부터 손골에 순례가 시작되었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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