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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다리
수리산 둘레길과 수리산 성지로 본문
수리산 둘레길을 넘어 수리산 성지로 가다.
수리산역에서 출발하여 단풍으로 물든 아파트 단지 공원을 거쳐 산본역 광장을 지나 산본성당으로 갔다.
성당을 거쳐 태을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전주이씨안양군묘을 방문하였다. 조선 성종의 3째 아들 안양군 이행의 묘소이다.
다음으로는 길을 건너 주택가에 위치한 조선 백자도요지를 방문하였다. 서민의 용기를 생산하던 민요로
특별히 주문을 받고 생산한 관요이었던 곳이다. 주택가를 나와 둘레길로 들어섰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수리산의 수목은 단풍으로 물들고, 겨울을 준비하느라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다.
수리산 능선을 넘어 수암천 계곡으로 내려가 수리산 성지로 향한다.
코스 : 수리산역-산본성당-안양군묘소-백자도요지-둘레길-최경환성인고택-수리산성지-병목안-안양역
수리산 안내도
수리산역에서 산본성당으로
공원의 단풍
은행나무
산본성당에서
全州李氏安陽君墓
조선 성종의 셋째 아들 안양군 이행(?∼1505)의 묘이다.
이행의 어머니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의 원인을 성종의 후궁인 정씨와 엄씨가
무고하게 왕에게 고(告)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연산군 10년(1504)에 안양군과 정씨, 봉안군(성종의 여섯째 아들)에게 사약을 내렸다.
1506년에 중종이 즉위하면서 복직되었고,
중종 15년(1520)에 부인의 상소에 따라 다시 장례를 지내도록 교지가 내려졌다.
묘는 부인 능성 구씨와의 합장묘이며, 묘역은 원래의 자리가 아니라
고종 32년(1895) 양주에서 석물과 함께 이장한 것이다.
봉분 앞에는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불을 밝히기 위한 장명등이 있다.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 앞에는 신종묵이 글을 짓고, 이일형이 글씨를 쓴신도비
(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 석물
석등
軍浦 山本洞 朝鮮白磁 窯址
조선 후기의 민간 가마터이다. 가마는 7칸으로 아궁이가 좁고 굴뚝 부분이 넓은 조선백자가마의 구조를 보인다.
주로 접시와 대접이 많이 발견되었고, 관요에서 생산하던 ‘복(福)’, ‘제(祭)’자 등이 쓰여 있는 청화백자 조각도
많이 출토되었다. 토기와 접시, 도자기 등 서민생활에 필요한 용기를 생산하는 민요에서도 특수용도의 그릇을
관요에서 주문받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요지란 토기나 기와, 자기를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수리산 남동쪽 해발 91∼98m의 구릉에 자리한 이 가마터는 조선시대 자기를 굽던 곳으로, 비교적 가파른
암반 위에 있다. 가마 이외에 주변관련 유구는 확인할 수 없다. 가마는 7칸으로 아궁이 쪽이 좁고,
굴뚝부분이 넓은 조선 백자 가마의 일반구조를 보이지만, 아궁이 구조가 특이하다.
주로 대접과 접시종류가 많이 나왔고 항아리편이나 합으로 된 여러 종류의 자기가 발견 되었다.
특히 청화백자 조각이 많이 있었고, 대접에 복(福), 제(祭)의 여러 글자들이 씌어 있다.
이는 이 가마터가 일상 생활용기만 만든 것이 아니라, 특수용도의 그릇도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라에서 관리하던 가마터(관요)인 금사리 가마터에서도 이러한 자기류와 가마구조를
보이고 있어, 같은 시기(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며, 관요와 일반가마터의 관계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산본동 가마터는 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가마 제작방법과 관요와 일반가마터의 관계를 보여주는
조선후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일반가마터에서도 특수용도의 그릇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http://heritage.daum.net/heritage/18877/intro.daum
둘레길 입구의 수리산 안내도
노랑바위
수리산 둘레길
수리산 능선을 넘어가는 중 태을봉은 우측길로
수암천 계곡
수리산성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잠들어 계시는 성지(聖地)이며 신앙선조들의 옛교우촌입니다.
확고한 신앙과 복음정신으로 수리산 교우촌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사시다가 참혹한 옥중생활 끝에
순교하신 성인을 생각하면 지금의 신앙생활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큰아들 최양업(토마스)를
유학보냈다 하여 가혹한 형벌 끝에 자녀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남편을 따라 용감히 휘광이의
칼을 받으신 이성례(마리아) 순교자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경기도 과천(현재의 안양이 예전에는 과천지방에 속해 있었음) 수리산 속에 있었던 '뒷듬이'
마을은 푸른 소나무 숲속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었다. 양지 바른 산비탈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집을 짓고, 담배밭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가며 살아가던 이 마을은 20여호 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룬 오래된 교우촌이다.
신도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담배촌이라 칭한다. 이 마을을 유서깊은 교우촌으로 개척한 사람이 바로 최경환
프란치스꼬 성인이다. 현재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소재로 중앙성당 관할구역 내에 있다.
최경환 성인 고택
고택의 은행나무
고택 성당
고택 성당
수리산 최경환 성인 성지
최경환 성인상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09월 20일) 1839.9.12 순교 한국 회장 (경주 최가)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
(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40도와 곤장 1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http://www.surisan.kr/b-1.htm
성인 성지 입구
최경환 성인 묘소
성지 순레에 참여한 일행
묵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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